섹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는 리트머스 종이
과도하게 은폐되었기에 과도하게 신비화된 섹스
“하기는 할 건데,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섹스가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섹스를 하고 싶기는 한데,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그 때는 언제일까? 대체로 답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좀 더 확실해지고 나서’다. 이런 대답은 대체로 여자가 많이 하지만 남자 중에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남자와 여자의 성에 대한 인식 차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깊게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런 일은 왜 벌어지는 걸까? 연애를 하고 있지만 때가 될 때까지 섹스를 미뤄두는 이유는 뭘까? 근본적인 이유는 섹스가 사랑의 결실이라고 여기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섹스는 오랜 시간 내밀한 영역에서 은폐되어 있었기에 과도하게 신비화된 측면이 있다. 인간도 동물이다. 그래서 인간 역시 동물이 하는 것을 하며 산다. 먹고, 마시고, 자고. 이런 것들이 딱히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숨어서 할 필요도 없고, 그러지도 않는다. 하지만 유독 섹스만은 그렇지 않다. 동물들은 섹스를 할 때 주변의 눈치를 본다거나 은폐되고 밀폐된 공간을 찾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섹스를 가장 은밀하고 은폐된 곳에서 하려고 한다. 섹스라는 것을 다른 욕망에 비해 과도하게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금기시 된 것은 반드시 과도하게 신비화된다. 과도하게 신비화된 것은 중요한 것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섹스가 그렇다. 섹스는 거의 모든 인간이 하는 일반적이 행위다. 하지만 인간은 섹스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한다. 그건 섹스가 긴 시간 가장 강력하게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섹스가 사랑의 결실이라는 고정관념은 바로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발생한 것이다. 마치 섹스가 사랑의 보증서인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은 섹스를 과도하게 은폐하느라 과도하게 신비화된 탓이다.
섹스는 사랑의 시작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섹스는 사랑의 완성도, 결실도, 보증서도 아니다. 섹스는 사랑의 시작일 뿐이다. 사랑이 완성되면 섹스를 하겠다는 생각은 섹스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에 하나다. 연애를 하고 있다면 때를 기다려 섹스할 필요 없다. 섹스, 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된다. 물론 그 대상이 ‘아무나’는 아니다. 사랑이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섹스를 해도 좋다는 말이다. 섹스가 바로 사랑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사랑(정신)의 완성은 결국 섹스(육체)의 교감이 없다면, 이루어지기 어렵다. 사랑이 완성되면 섹스를 하겠다는 말은 영원히 사랑을 완성하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선언과 다름없다. 물론 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해서 선뜻 상대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것도, 또 상대의 섹스 요구에 선뜩 응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인간 역시 동물이기에 사랑의 감정 말고 단순한 섹스에 대한 육체적 욕구가 있을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섹스가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누군가와 섹스를 끝낸 후 남는 것이 공허와 허무 혹은 후회뿐이라면 그 상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섹스 후에 상대를 향한 애틋함, 충만감, 소망스러움이 찾아온다면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섹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는 리트머스 종이인지도 모르겠다. 섹스가 끝난 후에 리트머스의 종이에 남겨진 색깔을 통해 자신과 상대의 감정이 단순한 욕정이 있었는지 아니면 사랑이었는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
혹시 사랑의 감정이 움터오는 것을 직감하지만 섹스를 미루는 건, 나와 상대의 감정을 정직하게 확인할 용기가 없어서는 아닐까? 서로의 정직한 감정을 확인할 때 받게 될 상처가 두려워서. 상처를 피하기 위해 자신을 그리고 상대를 속이는 것은 우리들의 너무도 오래된 습관 아니던가.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도 잔인하게 말했나보다. 사랑은 ‘목숨을 건 비약’이라고. 섹스는 분명 ‘목숨을 건 비약’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비약이 없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에 도달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