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는 믿음 없는 이들에게 채워진 자발적 족쇄다.
‘사랑한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일까?
‘클럽에 가지 말라’는 의무 수행 요구에 남자 친구는 뭐라고 답할까? ‘남자와 단 둘이 밥 먹지 말라’는 의무 수행 요구에 여자 친구는 뭐라고 답할까? 둘 모두 대답은 같다. “나 못 믿어?” 연애 중에는 종종 ‘의무’는 ‘믿음’의 영역으로 환치된다. ‘널 얼마나 사랑하는 데 클럽 가서 딴 여자랑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아?’ ‘오빠를 얼마나 사랑하는 데 남자랑 밥 먹는 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되묻게 된다.
때로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사랑을 의무로 변질시키지 말라는 의미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믿고 그 사람에게 그 어떤 의무나 강요도 요구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멋있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사랑하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건 믿는다.’라는 이야기는 성숙한 사랑의 모습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은 현실을 너무나 왜곡하는 무서운 말이다.
‘사랑한다=믿는다’라는 도식을 뒤집어 보자. ‘믿지 못한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된다. ‘사랑하면 믿는다’라는 말이 진실이라면, ‘믿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도 진실이 된다. ‘사랑=믿음’이라면, 클럽을 가지 말라고 강요하는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남자와 밥을 먹지 말라고 강요하는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 여자는 남자를 너무 사랑하기에 의무를 강요한 것이고, 남자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의무는 믿음 없는 이들에게 채워진 자발적 족쇄다.
‘사랑한다=믿는다’라는 도식은 때로 심각한 오해를 야기한다. ‘사랑한다=믿는다’는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상대가 어떤 의무를 강요하려고 했을 때,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된다. 사랑하면 믿어야 하는데 나를 믿지 않으니까 의무를 부여하려는 것 아닌가. 의무? 그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가치를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윤리적·도덕적 족쇄를 채우는 것이다. 정말이다. 세상의 모든 의무를 생각해보라.
국방의 의무? 그건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채워진 윤리적·도덕적 족쇄다. 효도의 의무? 그건 부모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채워진 윤리적·도덕적 족쇄다. 국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입대를 의무라고 여기지 않는다.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효도를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입대와 효도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의무는 결국 믿지 못하는 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윤리적·도덕적 족쇄다.
정직하게 말해보자. ‘사랑한다=믿는다’는 도식은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논리다. 정말 사랑한다면, 연인이 싫어하는 혹은 걱정 시키는 일들은 애초에 하려고 하지 않게 마련이다. 그런데 클럽? 그게 뭐 대수라고 여자 친구를 걱정시키면서까지 가는 걸까? 남자와 둘이서 밥 먹는 거? 그게 뭐 대수라고 남자 친구를 불안하게 만들면서까지 하는 걸까? 어쩌면 그네들은 연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기에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닐까? “너 나 못 믿어?”
‘사랑한다’ ≠ ‘믿는다’
‘사랑한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이 아니다. 정말이다. 사랑이 시작되었던 시점으로 돌아 가보자. 지금의 연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게 된 이후에 그(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 채 사랑을 시작하게 되고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누군가를 알게 되어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한 사람을 알게 된다.
그러니 생각해보라.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아는 만큼 믿게 된다. 사랑하는 만큼 그를 알게 되고, 그렇게 알게 된 만큼 그를 믿게 되는 셈이다. 사랑해서 알게 되고 그 후에 믿게 되는 것이다. 도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앎→믿음’인 셈이다. 사랑과 믿음은 동시적인 사건이 아니다. 사랑이 먼저고 믿음이 나중이다. 그러니 ‘사랑은 믿음’이라는 이야기처럼 현실을 왜곡하는 말도 없다. 현실에서는 사랑하지만 아니 사랑하기에 상대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묘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랑≠믿음’이 아니라면, 사랑은 의무가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사랑하지만 믿지 못하는 상대와 연애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 사랑을 의무로 규정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랑하는 연인을 믿지 못하기에 ‘연애 중 클럽 금지’ ‘남자와 단둘이 식사금지’라는 의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지금 우리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사랑을 의무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