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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믿어준다’

사랑은 어떠한 겨우라도 결코 의무가 아니다.

사랑은 결코 의무가 아니다.


‘사랑을 의무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 이 질문은 중요하다.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하게 되느냐에 따라 우리의 연애는 현격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우리네 연애는 어떻게 달라질까?

      

 사랑을 의무라고 받아들일 때 어떤 연애를 하게 될까? ‘연애하면 이런 건 꼭 지켜야지’라며 스스로를 속박하는 삶을 살고, ‘연애할 때 그런 건 절대 하지 마!’라며 상대에게 의무를 강요하는 일종의 폭력을 자행할 게 될지도 모른다. 반대로 사랑은 결코 의무가 아니라고 받아들이는 경우는 어떨까? ‘애인이 있는데도 하고 싶은 걸 맘대로 해도 되나?’라며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해야 할 것이며, ‘클럽 가서 혹시 다른 여자가 생기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속앓이를 해야 할 테다. 


 결론부터 가자. 사랑은 의무가 아니다. 이건 연애의 시작이든, 끝이든, 연애 중이든 마찬가지다. 사랑은 언제나 욕망이다. 욕망하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고, 욕망하는 만큼 연애하고, 그 욕망이 끝났다면 이별해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사랑에는 의무가 끼어들 틈은 없다. 동시에 사랑은 믿음도 아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믿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하는 상대를 믿지도 못하는데, 의무를 강요할 수도 없으니 속 타는 우리의 마음은 대체 어찌 해야 할까?



‘사랑한다’ = ‘믿어준다’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규정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믿어준다’는 말이다. ‘믿는다’와 ‘믿어준다’는 말의 차이는 사랑과 증오만큼이나 다르다. ‘사랑하면 믿는다’라는 말은 당위적이다. 사랑하면 자동적으로 믿게 된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사랑하면 믿어준다’는 말은 의지적이다. 누군가를 사랑해도 여전히 그가 의심되지만 의지를 가지고 믿어주려고 노력한다는 의미다.


 남자 친구가 클럽에 간다고 하면 온갖 의심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내주자. 아니 보내주려고 노력하자. 여자 친구가 남자와 단 둘이 밥을 먹는다고 하면 온갖 불길한 상상이 엄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내주자. 아니 보내주려고 노력하자. 그것은 분명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상대를 너무 사랑하니까. 그 힘듦은 사랑하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힘들지 않다면, 쿨한 게 아니라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쿨한 게 아니다. 한 없이 찌질하고 못난 것이다. 클럽에 가지 못하게 떼쓰는, 남자와 밥을 먹지 말라고 떼쓰는 사랑은 얼마나 찌질하고 못났나? 하지만 그게 사랑이다. 바로 여기에서 미숙한 사랑과 성숙한 사랑의 차이가 드러난다. 성숙한 사랑은 찌질하고 못난 그 미숙한 사랑을 넘어서는 사랑이다. 성숙한 사랑은 사랑해서 찌질해지고 못나지려는 자신을 악착같이 막아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랑이다.


 사랑이 의무인지 아닌지에 대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사랑은 결코 의무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사랑에 단하나의 의무가 있다면 그건, 연인을 ‘믿어주려는’ 의무일 것이다. 사랑은 의무도 믿음도 아니기에, 사랑은 상대를 믿어주려는 끊임없는 의지적 노력이다. 물론 그 의지적 노력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말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물며 사랑, 그 좋은 것이 공짜 일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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