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정말 사랑했을까?
사랑, 하고 있나요?
“내일 뭐할까?”
“뭐, 하던 대로 영화보고, 밥 먹고 그러면 되지”
“그래, 그러면 되겠네.”
첫 만남의 긴장, 첫 연애 설렘, 열애의 애틋함을 모두 지나 온 연인들은 안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 자리에 일상의 익숙함이 자리 잡는 다는 걸. 내일 뭐할까를 묻지만 더 이상 설레지도 않고, 딱히 새로운 것도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서운하지도 않다. 익숙함이다. 오래된 연인이 느끼는 익숙함. 그 익숙함은 권태감을 주기에 사랑을 의심하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편안함을 주기에 사랑임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
오래된 연인은 사랑을 묻지 않는다. 왜 일까? 성숙한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건 사랑을 진지하게 묻는 순간, 자신을 유지해왔던 익숙함에 심각한 균열이 생길 수 있음을 직감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된 연인에게 “너, 나 사랑하니?”라는 질문은 금기다. 그 질문은 ‘이제 우리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바로 지금이 물어야 할 때다. ‘사랑, 하고 있을까?’
사랑이 끝났다면 이별이다.
이것부터 말하자. 사랑이 끝났다면 이별이다. 오래된 연인은 종종 말한다. ‘늘 새로울 수는 없잖아.’ ‘설레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잖아’ 자기합리화다. 사랑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알지만 지나온 추억이 주는 익숙함과 결별할 수 없어 만들어낸 애절한 자기합리화. 이별 뒤에 찾아올 익숙한 것과의 이별을 감당할 수 없기에 그렇게라도 자기합리화를 할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그것을 왜 모를까. 하지만 편안하기에 권태롭고, 권태롭기에 편안한 시간이 찾아왔다면, 아프게 물어야 한다. ‘사랑, 하고 있을까?’
‘사랑, 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은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던진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일까?’라는 질문과 ‘이제껏 해왔던 게 정말 사랑이었을까?’라는 질문. 첫 번째 질문이 아프다면, 두 번째 질문은 잔인하다. 연인과 함께 했던 추억과 심지어 내 삶의 일부마저 부정하게 될지도 모를 질문이기에 그렇다. 더 큰 행복을 주는, 성숙한 사랑을 위해서는 이 아프고 잔인한 두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두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다시 사랑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철학자 이진경은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은 다른 감각을 갖게 만들고, 다른 세계에 눈뜨게 하는 사건이다. 그것을 통해 나를 넘어서는 사건이다.” 이 사랑의 정의로 두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잔인한 질문부터 가자. ‘이제껏 해왔던 게 사랑이었을까?’라는 질문은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나는 연인을 통해 다른 감각이 생겼을까? 다른 세계에 눈을 떴을까? 나를 넘어섰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