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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연인들에게

익숙함의 두 가지 이름

연애戀愛, 또는 연아戀我


누군가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적이 있을까? 누군가를 통해 절대 갈 일이 없을 것 같던 미술관이라는 데를 가게 되었을까? 그렇게 결코 될 것 같지 않았던 사람이 되었을까? 자신을 넘어서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까? 구체적인 경험은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었을 게다. 사랑이라는 감정만이 새로운 감각을 갖게 하고, 다른 세계에 눈뜨게 하며, 그래서 자신을 넘어서게 하니까.


 하지만 답이 ‘아니요’라면 안타깝게도 누구를 만났든 사랑한 적이 없는 것이다. 연인이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자신의 삶의 관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 긴 시간 연애를 했지만, 새로운 감각이 생기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눈떠본 적도 없고, 그래서 자신을 넘어서는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다면, 그것은 연애戀愛가 아니다. 차라리 ‘연아’戀我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연애는 사랑(愛)을 그리워하는(戀) 것인데, 어떤 이의 사랑은 자신(我)을 그리워하기(戀)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려는 사람이 한 건, 연애가 아니라 ‘연아’다. 물론 누군가를 만나 온전한 ‘연아’를 하는 사람도 드물다. 전한 사랑이 어려운 만큼, 완전한 사랑 아님 또한 어렵다. 불안전한, 여전히 성숙하고 있는 우리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사랑 아님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랑이다. 연인을 만나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익숙함의 두 가지 이름

현실의 연애, 우리의 연애는, 연인을 통해 아주 조금일지라도 새로운 감각이 생기고, 새로운 세계에 눈 뜨고, 조금이지만 자신을 넘어서는 그런 연애다. 미술관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남자가 어디서 ‘렘브란트’에 대해서 떠들 수 있고, 야구에 관심도 없던 여자가 복잡한 야구 규칙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미술관 옆 카페에서 만난 아름다웠던 그녀 덕분이다. 일요일 아침 운동장에서 만난 야구를 하며 땀을 흘리던 근사한 그 덕분이다.    

  

 우리는 사랑했다. 새로운 감각이 생긴 만큼, 새로운 세계에 눈뜬 만큼, 자신을 넘어선 만큼. 하지만 과거에 사랑을 했다고 해도 다시 물어야 한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인지. 두 번째 질문을 하자. ‘지금 하고 있는 게 사랑일까?’ 오래된 연인들에게 이 질문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사랑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 순간은 어디였을까?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면, 지금의 감정이 사랑이 아님을 그래서 이별해야 하는 시간임을 조금 더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 끝난 지점


 권태와 편안함을 동시에 주는 익숙함이 찾아왔던 순간이 바로 사랑이 끝난 지점이다. 이렇게 묻자. 연애 중이지만 더 이상 새로운 감각이 생기지도 않고, 더 이상 새로운 세계에 눈뜨지 않고, 자신을 넘어서는 경험 없는 지점은 어디였을까? 그건 익숙함이 찾아왔던 순간과 거의 정확하게 겹칠 게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익숙해졌기에 더 이상 새로운 감각도, 세계도 경험하지 못하고,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니까. 익숙한 것 앞에 우리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익숙함은 권태와 편안함을 동반한다. 익숙함이 주는 권태로움의 정체는 뭘까? 새로운 감각이 더 이상 생기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직감이 주는 불편함일 게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더 이상 자신을 넘어서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일 게다. 익숙함이란 동전의 앞면이 권태로움이라면 뒷면은 편안함이다. 권태롭기에 편안하고, 편안하기에 권태롭다. 삶은 이리도 잔인하다.     


 사랑은 기묘한 감정이다. 편안하지 않기에 행복한 것이고, 편안해져버리면 불행해지는 것이니까. 그게 사랑이다. 권태로움이 나쁜 것도, 편안함이 좋은 것도 아니다. 익숙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익숙함은 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우린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에 각자의 답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랑이 끝난 곳에서, 익숙함이 찾아온 곳에서 용기 내어 이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또 다시 사랑이 찾아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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