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는 엑스터시다.
‘몸정’은 사랑일까?
사랑과 섹스는 별개의 영역도,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밝혔다. 사랑이란 감정이 섹스를 통해서 더욱 깊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도식으로 표현하자면, ‘사랑→섹스→사랑’이란 말이다. 그런데 사랑과 섹스는 같이 가는 것이고 그 둘이 반비례가 관계가 아니라면, 사랑과 섹스에 관한 불편한 질문이 생긴다. 그건 ‘섹스→사랑→섹스’라는 도식에 관련된 것이다. ‘섹스가 먼저인 관계를 통해서도 사랑이 생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섹스하면 사랑하게 될까? 윤리적, 도덕적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대답은 ‘결코 그런 일은 없다!’일 게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대답은 ‘그럴 수 있다’이다. ‘몸정’이란 말을 들어본 적 있을까? 이건 사랑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만족을 주는 섹스를 주기적으로 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어떤 유대감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몸정’ 역시 사랑의 감정이 전혀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
연인(A)이 있지만 다른 사람(B)과 주기적으로 섹스하는 사람(C)이 있다고 해보자. 그럼 C가 B에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정말 성적 욕망뿐일까? 그렇지 않다. 가끔 B와 영화도 보고 싶고, 식사도 함께 하고 싶다. 또 B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해주고, 슬픈 일이 생기면 C 역시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완전히 똑같다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C가 B를 만날 때 느끼는 감정은 A를 만날 때 느끼는 감정과 유사할 것이다. ‘몸정’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몸정이 생기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랑과 섹스가 별개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해서 섹스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섹스를 해서 사랑과 비슷한 감정에 도달할 수도 있다.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은 따로 있지 않다. 아니 정신이란 건 애초에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은 이미 육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둘은 하나다. 정신이 누군가를 원한다는 건 육체가 원한다는 것이고, 육체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정신이 원한다는 말이다.
섹스는 엑시터시다.
섹스가 무엇이기에 없던 사랑의 감정도 만들어 내는 걸까? 섹스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몇 해 전 몇몇 연예인들이 복용한 마약이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다. 언론에 공개된 그 마약의 이름이 ‘엑스터시’였다. ‘엑스터시’ecstasy는 무아경이나 황홀이라는 단어로 번역된다. 무아지경에 이르렀다는 것, 황홀하다는 것은 어떤 걸까? 그건 자신이 없다고 느껴지는 기분이다. 즉, 엑스터시는 자신이 없다고 느껴지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엑스터시’ecstasy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엑스터시’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엑스타시스’ekstasis다. 바깥을 의미하는 ‘엑스’(ek=ex)와 상태를 의미하는 ‘스타시스’stasis가 합쳐진 엑스타시스라는 단어는 ‘바깥으로 나가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엑스터시가 자신이 없다고 느껴지는 상태나 기분을 의미하는 이유는 자신이 바깥으로 나가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결국 섹스가 주는 즐거움은 엑스터시, 즉 바깥으로 나가 자신이 없다고 느끼는 기분에 기원한다.
격정적인 섹스를 통해 오르가즘에 도달해본 사람은 안다. 시간이 어찌 가는지도,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무아의 경지에 도달해있다는 걸. 그 엑스터시의 경험은 너무도 강렬하기에 사랑과 유사한 감정까지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아의 상태에 이를 만큼 황홀한 섹스를 통해 사랑과 유사한 감정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고되고 힘든 세상살이에서 나를 무아의 상태로 끌어들일 그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