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정은 사랑의 유사품
‘몸정’은 사랑의 유사품
황홀한 섹스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끌어낼 수 있을까? 섹스를 통해 사랑의 감정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유사품이다. ‘몸정’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유사품이다. 10년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Y라는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해왔던 삶이 억울해서였을까? 지조 있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억압된 성적 욕망이 이별과 함께 터져버려서일까? 그녀는 이 남자 저 남자와 잠자리를 갖기 시작했다.
애초에 사랑은 없었다. 많은 남자들이 하룻밤으로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한 사람은 달랐다. 물론 그 남자 역시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기적으로 만나 그와 섹스를 했다. 그와 섹스가 너무나 황홀했기 때문이었다. 10년을 사귄 남자친구와는 단 한 번 느껴보지 못했던 무아의 황홀경을 그 남자는 하룻밤에도 몇 번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랑한 건 아니었지만 Y는 가끔 그 남자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 생각은 섹스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함께 영화도 보았고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섹스가 주는 엑스터시 그 자체가 너무 매혹적이기 때문일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몸정이 사랑의 감정까지 육박해 들어오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조금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엑스터시는 ‘바깥으로 나가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바깥으로 나갔기에 자신이 없는 무아 혹은 황홀의 상태가 도달한 것 아닌가? 여기서 다시 질문할 수 있다. 나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면 무엇이 있는가?
섹스, 대화 없음의 대화
무아의 상태에 이르러서 바깥으로 나서면 만나게 되는 건, 타자다. 자신의 바깥은 타자가 서 있는 자리다. 엑스터시는 기본적으로 나를 벗어나 타자와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인간의 절박한 바람이다. 자신 안에 있을 때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심연의 외로움, 불안을 자신 바깥으로 나가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나에게 엑스터시를 선사해주는 타자와의 섹스는 그 자체로 심연의 외로움과 불안을 덜어준다. 이것이 사랑 없는 섹스지만, 그것을 통해 절정의 엑스터시를 맛보게 되면 사랑과 유사한 감정으로까지 육박해 들어가는 이유다.
연애를 해본 사람은 안다. 이런 저런 일로 싸우고 난 뒤에 많은 대화를 나누어도 여전히 무엇인가 찜찜한 기분이 남는다는 걸. 그리고 제대로 된 연애를 단 한 번이라도 경험 해본 사람은 안다. 그 찜찜한 기분은 서로의 몸을 격정적으로 탐하는 황홀한 섹스를 통해 온전하게 해소된다는 사실을. 그렇다. 섹스는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대화다. 엑스터시를 동반하는 섹스는 ‘대화 없음의 대화’인 셈이다.
그리고 이 ‘대화 없음의 대화’야 말로 그 어떤 대화보다 서로에 대해 깊게 알 수 있게 해주는 대화 방식이다. 그렇기에 엑스터시를 느끼게 해주는 섹스는 연인의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심지어 연인이 아니라도 사랑과 유사한 감정까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심연의 외로움과 불안을 덜어내고 싶은 절박한 바람이 있는 까닭이다. '남녀 관계는 둘 밖에 모른다'는 이야기는 ‘대화 없음의 대화’는 오직 둘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