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정은 사랑이 되기 어렵다.
‘몸정’은 사랑은 될 수 있을까?
‘몸정’은 사랑의 유사품이라고 말했다. 정서적 대화 없는 육체적 대화는 잠시의 엑스터시를 주지만 이내 더 큰 허무와 외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Y는 어떻게 되었을까? 엑스터시를 느끼게 해주었던 남자를 계속 만났을까? 곧 헤어졌다. 이유는 외로움과 허무 때문이었다. 엑시터시는 바깥으로 나가 타자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 무아의 황홀경을 느낄 때는 외로움과 허무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다.
마약의 이름에 왜 '엑스터시'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결국 엑스터시라는 육체적 대화는 짧은 무아의 황홀 뒤에 더 큰 허무와 외로움을 남기기 때문이다. '엑시터시'라는 마약이 그런 것처럼. 그녀는 절정의 육체적 쾌락에서 외로움과 허무를 벗어날 방법을 찾은 듯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끝에는 더 큰 외로움과 허무를 만나게 된 셈이다. 그래서 엑스터시를 선사한 그 남자와 더 이상 섹스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몸정’은 사랑이 되기 어렵다. 그건 서로의 육체만을 탐닉하는 ‘대화 없음의 대화’는 온전한 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섹스를 통해 엑스터시를 느껴도 정서적 교감이 없다면 온전한 사랑으로 발돋움하기 어렵다. 인간은 섹스하고 싶은 동물이지만, 섹스만 하면 되는 동물과는 다른 존재다. 그래서 사랑 없는 섹스가 가능한 만큼, 섹스 없는 사랑도 가능한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혹은 불행한 사고로 성적 능력을 잃어도 인간은 사랑할 수 있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반드시 찾게 된다. 섹스 이외에 ‘대화 없음의 대화’하는 방법을.
사랑에 필요한 두 가지 대화, 섹스와 산책
엑스터시가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 타자를 만나는 것이라면, 온전한 사랑을 위해 타자와 해야 할 대화는 두 가지다. ‘섹스’와 ‘산책’ 섹스가 대화 없음의 대화, 즉 신체의 대화라면, 산책은 대화 있음의 대화다. 쉽게 말해 언어를 통한 대화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언어를 통한 대화에 관한 것이다. ‘몸정’으로 만나는 관계도 언어를 통한 대화를 한다. 그래서 나는 언어로서의 대화에 ‘산책’이라는 은유적 이름을 붙이고 싶은 것이다.
‘몸정’으로 만나는 관계의 사람도 ‘오늘 뭐 먹을까?’ ‘어제 뭐했어?’라는 일상적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이건 내가 말하고 싶은 ‘산책’으로서의 대화가 아니다. 연인이 시간을 내어 한 적 한 곳에 산책을 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무슨 이야기를 할까? 물론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일상적인 이야기 뒤에는 서로의 심연을 읽어내려는 노력이 숨어 있다. 서로의 눈빛, 작은 떨림, 호흡 같은 미세한 것들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산책에는 그런 정서적 대화가 포함된다.
엑스터시는 육체적 오르가즘이 아니다. 엑스터시는 대화다. 신체로서의 대화, 언어로서의 대화. 이 두 가지 대화가 자연스럽게 교차될 때, 온전한 사랑의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쉽게 말하자. 모텔과 공원을 가로지르는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다. 모텔만 전전하는 관계는 몸정이지 사랑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원만 찾는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을 흉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짜 엑스터시를 맛보고 싶은가? 모텔과 공원, 섹스와 산책을 가로지르는 두 가지 대화를 모두 만끽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