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그널, 이별의 시그널
사랑의 시그널
“아내 분이 어떤 분인지 아세요?”
“20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집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요.”
사랑에 관한 수업을 하면서 중년의 남자와 주고받았던 대화다. 내심 놀랐다. 부부는 대체로 사랑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권태롭고 한편으로 편안한, 익숙함에 몸을 맡긴 채, 그냥 산다. 오해는 말자. 세상 부부들의 사랑을 부정하는 건 아니니까. 또 사랑은 없지만 함께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할 수도 있다. 결혼은 그런 거니까. 그 중년의 남자와 대화에서 놀랐던 건, 결혼한 지 20년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랑의 시그널이 있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난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없었구나!’라는 당혹감이다. 오래된 연인이지만 서로를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은 종종 서로에게 대해 이리 느낀다. “쟤가 이런 사람이었어!” 그 당혹감은 분명한 사랑의 시그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을 알고 싶다는 애절한 호기심에 다름 아니다. 그 호기심은 필연적으로 당혹감으로 찾아온다.
‘파스타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감자탕을 왜 이리 잘 먹는 거지?’ ‘분명 일이 바쁠 때는 연락을 하는 걸 싫어했는데, 요즘 왜 이리 자주 연락을 하는 거지?’ ‘매일 오락만 하는 줄 알았는데, 밀란 쿤데라를 어떻게 아는 거지?’라는 당혹감. 많은 시간을 보내서 이제는 그 사람을 조금 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느끼게 되는 당혹감, 그것이 사랑의 시그널이다.
이별의 시그널
“야, 이제 가봐, 여친 기다리겠다.”
“걱정 마. 화내다가도 좀 있으면 알아서 풀려. 나 걔 잘아.”
남자 둘이 게임을 하고 있다. 여자 친구와 약속이 있는데 게임 삼매경에 빠져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 없다. 이 대화에서 이별의 시그널을 읽을 수 있다. 남자 친구가 게임에 빠져 여자 친구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이별의 시그널일까? 그것도 이별의 시그널일 수 있다. 여자 친구보다 게임을 더 좋아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이별의 시그널은 따로 있다. “나 걔 잘아”라는 말이다.
우리는 때로 오래 사귄 연인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타자를 결코 알 수 없다. 왜냐? 첫째, 우리는 한 사람과 아무리 자주 그리고 오래 만나도 그 사람 전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평생을 매순간 함께 한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하물며 어떻게 타자(연인)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둘째, 백번 양보해서 한 사람 전체를 온전히 알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걸까? 아니다. 10년 전에 ‘나’와 10년 후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생물학적으로도 그렇다. 일정한 주기로 한 사람은 세포 단위까지 완전히 바뀐다. 지금 우리를 유지하고 있는 뼈, 살, 근육은 10 년 전의 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정신이라는 지속성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항상 같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물질이 된다.
마찬가지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미세하지만 분명 다른 사람이다. 하루만큼 육체는 늙어갈 것이고, 하루만큼의 시간이 남긴 기억들로 정신도 변해갈 테니까. 매순간 우리는 변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래서 타자를 결코 알 수 없다. 한 사람을 완전히 알았다고 해도, 그 사람은 내일 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할 테니까. 매일, 매순간 정신적 육체적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 인간이기에 우리는 타자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적으로 말한다.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우리는 너무 쉽게 한 사람에 대해서 다 아는 듯이 말한다. 그런데 한 사람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직장 상사, 직장 동료. 학교 선후배 같은 사람이다. 직장 상사는 부하 직원에 대해 다 안다는 듯이 말한다. “걔는 내가 아는데, 중요한 일은 시키면 안 돼” 선배는 후배에 대해 다 아는 듯이 말한다. “걔는 부르지 마. 전화해도 안 나올 거야” 그런데 이들은 사랑의 정서와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 아닌가?
“난 널 잘 알아”=“난 널 알고 싶지 않아”
상사는 부하직원을 모른다. 부하직원이 중요한 일을 그르쳤던 이유는 어머니의 투병 때문이라는 걸 모른다. 선배는 후배를 모른다. 후배가 연락해도 술자리에 안 나왔던 이유는 술자리가 아니라 바로 그 선배가 싫어서라는 걸 모른다. 마찬가지로 게임에 빠진 남자는 여자 친구를 모른다. 매번 약속 시간에 늦어도, 알아서 화를 풀었던 이유는 여자 친구가 속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자 친구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걸 모른다.
게임에 빠진 남자에게 여자 친구는 부하 직원과 후배의 다른 이름이었을 테다. 상사는 부하 직원을 사랑하지 않기에, 선배는 후배를 사랑하지 않기에, 자신이 편한 데로 상대를 재단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다 아는 척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 걔 잘아”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적나라하게 말해, “난 널 잘 알아”라는 말은 “난 널 알고 싶지 않아”라는 말이다.
사랑은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누군가를 안다고 믿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돌아볼 일이다. 연인들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흔히 나오는 말, “내가 널 모르니?”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그네들을 알고 있을까? 연인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느낀다면, 반대로 연인이 마치 나를 다 아는 것처럼 대한다면 눈치를 채야 한다. 사랑은 이미 끝났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