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그대가 사랑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사랑을 사랑으로서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칼 맑스
사랑에 관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그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여러분께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이제껏 남녀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러니까 ‘너’와 ‘나’에 관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조금 다른 속내가 있었습니다. 그건 사랑의 확장에 관한 문제입니다. ‘플라톤’이란 철학자는 “사랑에서 시작하지 않는 자는 철학이 무엇인지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철학이 무엇이기에 사랑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철학이 무엇인지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했을까요?
잠시 철학이 무엇인지 질문해보지요. 철학에 관한 많은 정의가 있겠지만. 저는 감히 철학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나’, ‘너’ 그리고 ‘우리’라는 주제까지 모두 다루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자기계발은 주로 ‘나’에 대해 다루고, 사회학은 주로 ‘우리’라는 주제를 다루지요. 하지만 철학은 ‘나’, ‘너’ 그리고 ‘우리’라는 주제를 모두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플라톤의 이야기가 이해될 것도 같습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에 대한 감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철학은 요원할 겁니다. 이 긴 이야기는 분명 ‘나와 너’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어보아도 좋을까요?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말라버린 시대에 ‘우리’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습니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건 강요해서도 안 되고, 또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그걸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다종다양한 연애를 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건 사랑은 다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는 겁니다. 너무나 좋아했던 여자 친구의 아버지가 환경미화원이었습니다. 그 여자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환경미화원은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해 더러운 일을 하고 냄새나는, 그래서 몰랐으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 친구와 연애를 하면서 저는 환경미화원이란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의 삶이 어떤지 애정을 갖고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뒤였을 겁니다. 친구와 밤새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느 겨울 새벽, 환경미화원 한 분이 청소를 하고 계셨지요. 저는 편의점에서 따뜻한 음료를 하나 사서 그 분에게 전해드렸습니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애절하게 사랑했던 그녀가 생각나서였는지, 아니면 그 환경미화원을 사랑해서였는지. 어찌 되었든 조금은 더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한 번도 본적 없는,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건 분명 ‘나’와 ‘너’의 사랑이 불러일으킨 ‘우리’의 사랑이었을 겁니다.
‘우리’의 사랑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의 사랑이 넘치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이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어찌 해야 할까요? 방법을 찾았습니다. 연애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나’와 ‘너’의 사랑이라는 연애를 통해서 확장될 겁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분향소를 찾았던 이유는 자식과 부모라는 ‘나’와 ‘너’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사랑이 확장되길 원합니다. ‘나’와 ‘너’의 사랑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사랑으로 확장되길 원합니다. 그렇게 연인을 사랑했던 절절한 마음으로, 이 사회에서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분들을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보다 ‘우리’의 사랑을 갈망했던 ‘칼 맑스’라는 철학자의 이야기로 연애에 관한 긴 글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그대가 사랑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사랑을 사랑으로서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2017년, 차가운 바다 속에 여전히 아이들을 묻어둔 한 겨울 어느 날, 황진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