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혁 칼럼] 누구나 꼰대다.

사랑의 어려움에 관한 고찰

어떤 대상을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


자연계에서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비자연적 습성이다. 그렇다. 인간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무언가가 비어있는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꽃을 보면 물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닭을 보면 요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도토리를 보면 도토리나무 혹은 도토리묵을 생각한다. 이처럼 현 존재는 늘 불완전하다. 인간은 늘 대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틈을 만들어 불완전한 존재로 여기고 그 틈에 “~해야 한다.”라는 자신의 생각을 끼워 넣으려 한다.


인간의 이러한 습성은 여러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식의 대상이 인간일 경우다. 어떤 인간이든지 인식 범위에 들어올 때면 그 인간에게도 틈을 파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여기고 여지없이 파진 틈에 “~해야 한다.”라는 자신의 생각을 끼워 넣으려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생각을 대상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 대상에게 내보이고야 만다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행위를 당하는 대상은 순간 여러 감정을 느낄 테지만, 그 감정들은 스피노자의 말처럼 크게 두 가지 감정에 속한다고 본다. 기쁨 아니면 슬픔이다. 하지만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어째서 누군가에게는 기쁨에 가까운 감정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슬픔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걸까?

바로 사랑의 유무이다. 다행히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의 감정, 특히나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사랑에 관한 감정은 성인이 되었어도 그나마 보존되어 있다. 인간은 느낄 수 있다. 이 사랑이 자신을 향한 사랑인지 “너를 위해서”라고 떠드는 그 인간을 향한 거꾸로 된 사랑인지 말이다.


거울에 비친 반전된 상이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짜이듯, 거꾸로 된 사랑은 가짜다.


이렇듯 습성이 강한 인간은 자신이 숭배하는 신의 기준으로 대상을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여기고 또 그러한 행위에만 몰두하기에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그렇기에 어떤 집단이던지 그러한 인간이 속해 있다면 그 집단은 결국 파국으로 이어지기 쉽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스피노자의 말처럼 기쁨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는 잡으려 노력하고,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는 멀리하면 될까? 물론 맞는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나 자신이 이미 습성이 강하게 몸에 밴 사람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

기쁨이던 슬픔이던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늘 비자발적인 부분과 자발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자발적인 부분, 즉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타자의 자유는 내가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망각할 수 있는 존재이고, 그렇기에 모험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자발적이다. 인간은 망각으로 인해 습성이 생기기 전인 아이에 가까운 모습으로 타자를 맞이하고, 그렇기에 겁 없고 과감하게 타자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망각은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를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수만 개를 생성하는 일이며,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절대적이었던 하나의 시선에서 변화무쌍한 수만 개의 시선을 갖게 되는 멋진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직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다.

물론 알다시피 사람은 쉽게 변할 수 없다. 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유리창 너머를 보면서 동시에 유리창에 비친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존재이기에. 다시 말해 자신이 어떤 의식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의식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이종혁 (MC 들뢰즈)
- 철학흥신소 소속 작가. (라고 본인은 한테 설득 중)
- 우울증 핑계대고 퇴사해서, 놀고 먹고 있음
- 놀고 먹다 지쳐, 랩을 만들고 주짓수를 하고 있음.

- 창의적인 인간임(창의성은 놀 때 발현된다는 것을 삶으로 입증 중)
- 아직은 방황하고 있지만, 계속 그럴 같음. (다행히 아버지가 돈이 좀 있음)
- 철학을 삶으로 받아들인다고 쌩똥을 싸고 있음

- 지금은, 제주도에서 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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