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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디언의 성인식

“이미 나흘 동안의 단식과 갈증 그리고 사흘 밤에 걸친 불면에 지친 젊은이들은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갔다. 때가 된 것이었다. 몸에 뚫린 구멍, 상처를 뚫고 나온 꼬챙이, 목매달기, 절단, 마지막 달리기 경우, 찢겨 나간 살 등 잔인함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은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중략) 부족에 따라 지역에 따라 이러한 잔인함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기법과 수단, 목적은 다르지만, 최종 목적은 항상 동일하다. 즉,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       


 어느 인디언 부족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때 나흘 동안 물과 음식도 주지 않고 잠도 재우지 않습니다. 심지어 꼬챙이로 살을 뚫고, 칼로 살을 도려는 고문을 행합니다. 왜일까요? 왜 이런 야만적인 짓을 하는 걸까요? 그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미개인들이기 때문일까요? ‘피에르 클라스트르’라는 영민한 정치인류학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제 막 성인이 되려는 이들에게 그리도 잔혹한 짓을 저지르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어쩔 수 없이 들러붙은 두 가지 욕망 때문일 겁니다. 지배 받고 싶은 욕망과 지배하고 싶은 욕망. 아이에서 성인되면 개인들마다 ‘힘(역량)’의 차이가 나게 됩니다. 이 힘이 큰 사람의 내면에는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자라고, 이 힘이 작은 사람의 내면에는 지배받고 싶은 욕망이 자랍니다. 이 두 가지 욕망의 결합이 국가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폭력적인 공동체의 근원입니다.

      

 이미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 없었다면,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이들이 설 자리는 애초에 없었을 테니까요. 달리 말해, 힘이 작더라도 마지막까지 싸울 준비가 된 이들만 존재했다면 감히 누가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서글프게도 억압하고 착취하고 싶은 마음은 복종할 준비가 끝난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인디언들은 이런 삶의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디언들의 잔혹한 성인식을 행했던 이유입니다.


  

“너희들은 우리와 같은 무리에 속한다.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와 같고 너희들은 서로 같다. 너희들은 똑같은 이름을 지니고 그 이름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 각각이 우리들 사이에 똑같은 공간과 장소를 차지한다. 너희들은 그것을 지킬 것이다. 너희들 중 누구도 우리보다 못하지 않고 낫지도 않다. 그리고 너희들은 그것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너희들의 몸 위에 남긴 동일한 각인이 극서을 너희들에게 계속 기억시킬 것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

      

 인디언 공동체가 잔혹한 성인식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각인시키려 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네가 누군가에게 지배당당하려고 했을 때 이와 같은 고통이 다시 찾아오리라! 네가 누군가를 지배하려고 했을 때 이와 같은 고통이 다시 찾아오리라!’ 잔혹한 성인식이 남기는 고통은 진정한 자유와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타인에게 지배당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타인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이 두 가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진정으로 아름다운 공동체가 도래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일까요? 지배하려는 욕망도, 지배받으려는 욕망도 없기에, 지배하는 이도, 지배받는 이도 없는 공동체.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인디언들의 잔혹한 성인식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지혜로운 결단인 셈입니다. 우리 내면에 저주처럼 들러붙은 두 가지 욕망을 흘려보내기 위한 지혜로운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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