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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혁 칼럼]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II

부모에 관한 글쓰기에 관하여

그렇다면 어쩌라는 이야기인가? 무의식에 휘둘리는 삶을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인가? 무의식은 의식의 차원에서 어떻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정신분석가는 한 가지 길을 제시해 준다. 한 대상에 쏠린 리비도를 흐르게 하는 방법. 바로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떠나보내는 애도의 방법이다.


오히려 잊으려고 노력하면 잊히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 대상이 리비도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차라리 그 대상을 기억하고 회상해야 한다. 그렇게 기억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대상에 리비도가 투자되면서 조금씩 리비도가 그 대상으로부터 일탈하게 된다. 즉, 그 대상에 투자되는 리비도의 양을 미리 앞질러서 고갈시켜 버리는 것이다. (멜랑꼴리의 검은 마술 - 맹정현)


대상은 풍선과도 같다. 풍선 속 고립된 대상 리비도를 흐르게 하는 방법은, 풍선에 대상 리비도를 더 투자하여 터트리는 것이다.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이제는 괜찮아졌다 자신을 위안하는 것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방식이다. 나는 글쓰기가 떠올랐다. 그때 그 상황으로 돌아가 대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상황을 글로 표현해 보는 것. 그것만큼이나 대상을 기억하고 회상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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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이러한 절차를 거친 한 대상이 있다. 아버지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 나의 대상 리비도는 그에게 몰려있었던 것 같다. 그래선지 누구도 사랑하기 어려웠고, 받고 있는 사랑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였지만, 동시에 증오감을 불타게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폭력성에 휘둘렸던 나이기에. 아마 의식의 영역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에도 그와의 특정 관계가 자리 잡아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 것이다.


어려서 그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용서해야 할 존재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보았고, 그렇게 그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다 큰 어른이 과거의 일 가지고 뭘... 이제 난 괜찮아.” 하지만 무의식은 달랐던 것 같다. 가끔 술에 취하면 이 친구 저 친구에게 아버지에 대한 욕을 해댔다. “씨발, 결혼을 하는 것도 부모가 되는 것도 대학교에 들어가는 거 마냥 남들 다 하니깐, 남들 다 하는 건 나도 해야 되니깐 하는 거라고. 다른 사람이 되기 싫어서, 틀린 사람이 되기 싫어서.” 다시 의식의 차원으로 돌아오면 후회스럽기도 했다. “에이, 이제 와서 그런 말해봐야 뭐 하겠어? 각자 힘든 걸 견디며 사는 거지, 내가 애도 아니고 말이야."


우연찮은 계기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주제는 ‘가족 이야기’였다. 아무리 과거를 떠올려 보아도 기뻤던 기억이 없었다. 남아 있는 기억이라곤 슬픈 기억뿐이었다. 그냥 슬픈 글을 써 내려갔다. 의식의 흐름대로. 처음으로 글을 쓰는 거라 어색했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늪에 빠진 나는 뭐라도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슬펐던 기억을 쓰다 보니 다른 슬픔들이 몰려왔다. 스쳐 지나갔던 가족들의 말을 시작으로 여러 사건이 떠오르기도 했다. 눈물이 났다.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꼬마 아이가 너무나도 가여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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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나니 무거웠던 족쇄 하나가 빠진 기분이 들었다. 해방감이 느껴졌다. 쓴 글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크게 한몫을 차지한 것 같다.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다는 게 무엇인지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다 지난 일이라며, 이제 괜찮다며 생각 속에서 이뤄졌던 위안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꺼내 놓았을 때와도 달랐다. 영화에 몰입을 할 때 옆에 사람이 있을 때와 없을 때에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혼자서 글을 쓰며 그때 상황으로 돌아가 본다는 건 마치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느낌과도 비슷했다. 끌려 올라오는 감정의 크기가 달랐다.


그런 글을 여러 차례 쓰게 되었다. 비슷한 주제로. 신기했던 점은 한 번 써봤던 내용의 글인데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감정이 달랐다는 것이다. 전과는 다르게 덤덤하게 써지는 글이 있기도 했지만, 어떤 글은 전보다 더 눈물이 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아버지를 주기 위한 편지를 쓰게 되었다. 쓰다 보니 분량이 늘고 늘어 다 쓰는데 반나절이 걸렸다. 그동안 글을 쓰며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행했던 과거를 들추어낸다는 건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에. 또 그걸 전달해야 된다 생각하니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선지 정신분석에서는 애도를 노동에 빗대어 표현한다. 대상에 대상 리비도를 더 투자하여 터트리고, 흐르게 만드는 것. 그 과정은 대상을 기억하고 회상함으로서만 가능하니 애도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맞는 것 같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기억을 통해 고통스럽게 리비도를 대상에게서 떼어 내는 과정을 ‘애도 작업’이라고 한다. (…) 좀 더 쉬운 말로 하자면, 애도는 노동이다. 애도는 힘든 노동인 것이다. 대상이 사라지면, 그 대상은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노동을 통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애도 작업이다. 애도 작업이 완결되면, 자아는 다시 자유롭게 되고 억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애도에서 일어나는 경제적인 메커니즘이다. (멜랑꼴리의 검은 마술 - 맹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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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라는 노동으로 애도 작업이 이루어졌는지 나의 삶에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어머니의 사랑이 보였고, 관심조차 없었던 누이의 고통이 보였다. 미안하다며 과거를 후회하는 아버지 또한 고통 받는 존재였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가족이라는 단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한 남자로, 어머니와 누이는 한 여자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고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세계에서는 타인은 배제되었고 오직 나만이 존재했었지만, 그런 세계에 타인들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동안 한 곳에 몰려 있던 대상 리비도가 흐르게 되었다는 신호와도 같이 느껴졌다. 고통의 벽을 넘어가 보니 더 큰 고통이 보였다. "삶은 고해다."라는 싯다르타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애도 작업이 필요한 대상은 부모뿐만이 아닐 거라 생각한다. 대상은 사랑했던 과거의 애인이 될 수도 있고, 나에게 상처를 주었기에 증오할 수밖에 없는 한 존재일 수도 있다. 또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 속 상상의 대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픈 과거를 들추어낸다는 것이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이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수록 옳다고 여겨지는 생각들로 그 균열을 메우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애도 작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드러내본 적 없는 민낯에 관한 글쓰기가 무의식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았으면 한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고통을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밝은 이야기도 좋지만 가끔은 꺼내보지 못했던 어두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곳 철학흥신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한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자리가 생긴다.”라는 이성복 시인의 말을 좋아한다. 나는 조금 바꿔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다. “쓰여지고, 보여진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설자리가 생긴다.”



이종혁
- 철학흥신소 수석 요원.
- 우울증 핑계대고 퇴사해서, 놀고 먹고 있음
- 놀고 먹다 지쳐, 랩을 만들고 주짓수하고, 스쿠버다이빙, 글쓰고, 철학 공부 하고 있음.

- 창의적인 인간임(창의성은 놀 때 발현된다는 것을 삶으로 입증 중)
- 방황하다가 이제 뭐 좀 할 것 같음. (다행히 아버지가 돈이 좀 있음)
- 철학을 삶으로 받아들인다고 쌩똥을 싸고 있음.

- 요새 공부 좀 했다고, 글이 길어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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