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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를 넘어, '삶의 주인'이 되는 법

악, 작은 선, 그리고 큰 선

착하게 살아야 호구가 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선하게(착하게) 살면 정말 호구가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 반대다. ‘선’하게 살고 ‘악’하게 살지 않아야 호구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선/악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선/악’이다. 스피노자의 ‘선/악’이 무엇인가? 기쁨을 주는 것을 따르고, 슬픔을 주는 것을 따르지 않는 것 아닌가. 즉,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기쁨을 주는 일을 따르고 슬픔을 주는 일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이 업무는 김 대리가 해줘요.” 직장 동료의 요청이다. 하지만 ‘김 대리’는 이미 하고 있는 업무만으로도 몇 일째 야근 중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 업무는 ‘김 대리’ 관련 업무도 아니다. ‘선’하게 살려는 김 대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네. 그럴게요.”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다. 그건 ‘악’한 행동이다. 그 업무를 맡았다간 더 큰 슬픔에 빠질 테니까 말이다. “싫어요. 그건 제 제 업무가 아니에요.” 이것이 ‘선’한 행동이다. 슬픔(업무)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기쁨(칼퇴)을 조금이라도 늘려나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기쁨을 따르는, 즉 ‘선’하게 사는 사람은 결코 호구가 되는 법이 없다. 슬픔을 따르는, 즉 ‘악’하게 살려는 사람이 호구가 된다. 자신의 기쁨은 뒷전으로 하는 이들. 타인의 기쁨을 위해 자신의 슬픔을 늘려가는 이들. 그런 ‘악’한 이들이 호구가 되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답답하다. 누구들 기쁘게(선하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세상은 ‘선’을 행하려는 이들에게 갖가지 불이익을 준다. 그것이 걱정되고 두려워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며 산다.     



호구가 되지 않으려다 더 큰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지?


직장 역시 그렇지 않은가. 직장에서 ‘선’(할 말 다하고, 추가 업무를 거부하고, 칼퇴를 하면)을 행하면 불량직원으로 찍혀 불이익을 받을 것만 같다. 그것이 두려워 ‘악’(할 말 못하고, 이일저일 다하고, 야근을 하며) 행하며 산다.  ‘호구가 되지 않으려다 더 큰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지?’ 이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호구적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걱정할 것 없다. 계속 ‘선’하게 살면 된다. 하지만 ‘선’에는 ‘작은 선’과 ‘큰 선’이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우선 ‘작은 선’부터 이야기해보자. ‘작은 선’을 행하며 사는 직원은 결코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그네들은 강단 있는 직원이 되지 불량 직원이 되지 않는 까닭이다. 선한(기쁨을 늘리려는) 직원은 자신의 업무가 아닌 일은 단호하게 ‘노’라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일은 비교적 유능하게 처리하게 된다. 어째서 그런가? 그들은 어떤 경우든 ‘선’하게 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기쁨(밥벌이)은 유지하고 슬픔(야근, 해고)을 줄여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단 있는 직원의 선은 ‘작은 선’이다. 그것은 왜 ‘작은 선’인가? 


 강단 있는 직원의 삶을 살펴보자. 만나고 싶지 않은 이(슬픔)들 속에서 하기 싫은 일(슬픔)로 밥벌이(기쁨)를 하는 삶이다. 그네들은 밥벌이(기쁨)는 하면서 더 큰 슬픔(야근, 해고)으로 떨어지는 것을 경우 막고 있을 뿐이다. 강단 있는 직원은 기쁨을 크게 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주어진 슬픔을 줄여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이 행하는 선은 작은 기쁨을 누리는 ‘작은 선’이다. 서글프게도, ‘작은 선’을 행하며 사는 이들 역시 때로 호구가 된다. 왜 그런가? ‘작은 선’을 행하려는 이들의 거의 유일한 기쁨이 돈인 까닭이다. 


 역설적이게도, ‘작은 선’을 행하는 이들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에 집중한다. 기쁨을 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줄이는 선을 행하려 한다. 작은 선을 행하는 이들은 슬픔의 근원(직장)을 벗어나려 한다. 그러기 위해 돈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작은 선’이 항상 돈으로 귀결되는 이유이다. 작은 선을 행하려는 이들이 어떻게 호구가 되는지 알겠다. 작은 선을 행하려는 이들은 주식으로 월급을 탕진하고, 엄한 곳에 투자해서 재산을 날리고, 심지어 사기를 당하는 호구가 된다. 쉽게 말해, ‘악’을 행하며 사는 이들은 직장 안에서 호구가 되고, ‘작은 선’을 행하며 사는 이들은 직장 밖에서 호구가 되는 셈이다.     



‘큰 선’을 행하는 삶


근본적으로 호구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큰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 진정으로 착하게 살면 호구가 될 일이 없다. 아니 강건한 삶의 주인이 된다. 큰 기쁨을 따르는 자는 삶의 주인이 된다. 대기업을 다니다 전업 작가로 전향한 이를 알고 있다. 글을 쓰고 산지 몇 년이 흘렀을 때 돈이 없었다. 보험, 적금은 이미 다 해지해서 생활비로 썼고, 잔고도 바닥났다. 그 즈음 예전 동료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슨, 자신이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할 것인데 함께 일해보자는 내용이었다. 그는 돈을 자신이 댈 테니 직장을 다닐 때 일을 해달라고 했다. 누가 봐도, 혹 할 제안이었다. 작가는 별 고민 없이 거절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는 ‘큰 선’(글쓰기)을 행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글쓰기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악’(직장)은 물론이고 ‘작은 선’(돈)도 강건하게 거부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 작가는 호구가 될 일이 없다.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직장 안에서 호구가 될 일도 없고, 돈을 더 벌기 위해 직장 밖에서도 호구 잡힐 일이 없다. 당연하다. 그는 자신의 ‘큰 선’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삶은 고될지라도, 큰 기쁨을 누리며 살 것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가 왜 ‘큰 선’을 행하지 못하는지도 알 수 있다. 큰 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것이 우리가 ‘악’과 ‘작은 선’을 행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큰 기쁨을 줄 일을 모르기에 슬픔을 줄 일을 하거나 작은 기쁨을 줄 일에 집착하게 되니까 말이다.



호구를 넘어 삶의 주인이 되는 법

  

각자는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어떤 것이 선인지 아니면 악인지유용한지 아니면 유용하지 않은지를 판단한다. (에티카제 3정리 39, 주석     


 호구를 넘어 삶의 주인이 되려면 자신의 ‘큰 선’이 무엇인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것이 선인지 악인지, 즉 어떤 것이 유용하고 유용하지 않은지는 감정에 의해서 판단된다.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감정. 그러니 ‘큰 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섬세하게 살피는 연습이 필요하다. 분명 돈을 벌었을 때 혹은 쓸 때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기쁨인지, 혹은 그보다 더 기쁨을 주는 일은 없는지 자신의 감정을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 이 연습이 부족해서 악과 작은 선에 휩쓸려 살게 된다. 

      

 호구를 벗어나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자신의 감정을 살펴야 한다. 나에게 가장 큰 기쁨 혹은 가장 큰 슬픔을 주는 일이 무엇인지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 그렇게 나의 ‘큰 선’과 ‘큰 악’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을 때, 호구를 넘어 강건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거꾸로 된 믿음을 바로 세울 때다. 삶의 주인이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다. 기쁨을 찾고 강건하게 그 기쁨을 줄 일을 해나가는 이가 삶의 주인이 된다. 삶의 주인을 꿈꾸는 이들이 부여잡고 살아야 할 질문은 이것뿐이다. “나의 큰 선은 무엇이며, 그 선을 행하며 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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