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너머의 공동체
“요즘 철학흥신소에 기가 쎈 사람들이 많아져서요.”
“나대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제 수업 가기 싫어요.”
조금 더 느슨하지만 조금 더 따뜻한 공동체를 바랐다. 더 아름다워지려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 몇몇 공동체를 찾아보았다. 좋은 의도로 좋은 사람들이 모여도 그 공동체는 결국 둘 중 하나였다. 사람이 다치거나 공동체가 파괴되거나. 그 현실을 깨달을 즈음 알게 되었다. 내가 찾는 공동체는 지금-여기에 없다는 사실을. 당연했다. 내가 찾는 공동체는 공동체 너머의 공동체였으니까. 천천히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공동체 너머의 공동체의 윤곽을 그려나가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혼자였다. 나의 작은 외침, 손짓과 몸짓에 한 두 사람이 모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꽤 많은 이들이 함께 했다. 직장, 동호회, 심지어 가족이라도, 어떤 공동체든 인원이 일정 수를 넘어가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철학흥신소라고 예외일 순 없었다. 그저 함께 공부하며 이야기 나누고, 가끔 밥을 먹고 술 한 잔 하는 공동체였던, 철학흥신소에서도 그런 일이 생겼다. 꽤 긴 시간 함께 했던 몇 몇이 내게 짧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대는 애'들은 공동체의 악인가?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각각의 이유를 길게 설명했지만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나대는 애’들 때문이었다. 떠난 이들은 철학흥신소는 좋지만 ‘나대는 애’들이 불편하다고 했다. 그렇게 몇 몇은 떠났다. 사람이 다치거나 공동체가 파괴되는 이유 중 적게 잡아도 7할 이상은 ‘나내는 애’들 때문이다. 그들 때문에 각종 마찰과 다툼이 벌어진다. 그걸 모르지 않는다. 그럼 ‘나대는 애’들은 공동체의 악이냐? 아니다. 오히려 ‘나대는 애’들은 공동체의 선에 가깝다.
우리의 오래된 습관을 생각해보라. 유익은 쉽게 잊고, 피해는 집요하게 기억하는 습관. '나대는 애'들 때문에 공동체에 각종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나대는 애’들 바로 공동체의 구심력이란 사실이다. ‘나대는 애’들이 나대었기에,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었다. 어떤 공동체든, 시작부터 사람이 다치거나 공동체가 파괴되지 않는다. 공동체의 유익이 먼저고 피해가 나중이다. 그 유익을 준 이들이 ‘나대는 애’들이다.
결국 ‘나대는 애’들은, 공동체를 만드는 동시에 파괴하는 이들이다. 공동체를 만든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선이지만, 파괴한다는 측면에서 악이다. 그런데 어찌 ‘나대는 애’들이 공동체의 선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악이 아닌 선이 될 기회. '나대는 이'들의 나댐은 자신을 위해서다. 더 관심 받고 더 사랑받고 싶어서 나대는 것이다. '나대는 애'들은 나르시스트다.
'나대는 애'들의 이기심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시에 파괴한다. 그렇다면, 그 파괴의 시점은 언제일까? 자신만 더 관심 받고 더 사랑 받고 싶을 때, 혹은 그러지 못하게 될까 불안할 때다. 그때 '나대는 애'들은 공동체 안에서 다시 파벌을 만들고, 편을 가르며, 옆 사람을 은근히 비난하고, 뒷담화를 한다. 그렇게 ‘나대는 애’들은 공동체의 악이 된다. 그걸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다. ‘나대는 애’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
'더 나대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위해서
진정한 이기심은 이타심이다. 진정으로 사랑받고 싶은 사람은 자신을 확장해나가게 된다. 한 명의 ‘나’보다 두 명, 세 명, 네 명의 ‘나’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이 언제나 더 큰 법이니까. 진정한 나르시시즘은 확장되는 나르시시즘이다. 옆 사람에서 나를 보는 것. 다시 그 옆 사람에게서 나를 보는 것. 나를 사랑하기보다 확장된 나를 사랑하는 사람. 그들이 진정한 나르시스트다.
진정한 나르시스트가 될 기회는 나대지 않는 이들은 애초에 받을 수 없는 기회다. 당연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악이다. 그 자신에게나 공동체에게나. 나대는 것보다 나대지 않는 것이 언제나 더 문제다. 이것이 내가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더 나대는 세상을 꿈꾸는 이유다. 나대지 않으면 자신도, 타인도 사랑할 수 없으니까.
'나대는 애'들이 싫을 수 있다. 그들의 나르시시즘이 싫을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그들의 문제라기보다 우리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나대지 않는 혹은 못하는 우리들의 나르시시즘 문제. 나대지 못해서 굳어버린 나르시시즘 때문에 나대는 애들이 그리도 싫은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나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나대는 애'들이 싫은 것 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나대는 애'들 옆에 있으면 내가 관심 받지 못할 것 같아서 그네들이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공동체를 꿈꾼다면, 아니 지독히 외로운 삶이 두렵다면, 적어도 '나대는 애'들을 조금 긴 호흡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함께’를 가능케 할 사람들이고, ‘혼자’를 막아줄 사람들이니까. '나대는 애'들의 비판과 비난은 그들의 이기심이 이타심 되지 못하고 이기심에 머물 때 해도 늦지 않다. 나는 ‘나대는 애’들을 힘껏 사랑해주고 싶다. 그들의 이기심이 이타심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진정으로 '나대는 애'들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