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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은밀한 적

다툼은 건강함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다툼은 불가피하다. 아니 그것은 건강함이다. 사람들이 모였는데 다투지 않는 것. 그것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둘 중 하나다. 다양성의 결여이거나 권력자의 억압이다. 군대라는 공동체가 이것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 군대는 여느 공동체에 비해 다툼이 현저히 적다. 왜 그런가? 다양성이 결여(군복, 거주지, 말투, 생각의 동일성) 되어있고, 권력자들(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의 억압이 항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툼은 공동체 와해의 전조가 아니라 건강함의 증거다. 그것은 저마다의 색깔이 지닌 단독적인 사람들이 모여 다양성을 유지하기에 일어나는 일인 까닭이다. 하지만 찜찜하다. 현실은 조금 다르지 않은가. 구성원들의 다툼 때문에 공동체에 갖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사실 아닌가. 두 사람이 대판 싸워서 직장, 동호회, 친목 모임이 파토 나는 일은 너무 흔하지 않은가. 이것을 건강함이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대판 싸운 둘의 관계는 건강하지 못한 채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둘이 속상한 공동체는 더 건강해진다. 직장에서 성찬과 혜원이 대판 다투었다. 혜원은 남직원이 여직원 보다 승진이 빠른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했고, 성찬은 남자가 더 일을 많이 하고 능력이 있으니 그런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이 대판 싸웠다. 둘의 관계는 파탄났다. 하지만 공동체는 다르다. 둘의 다툼으로 인해 ‘사내 성별 차별적 성취도 평가’라는 전에 없던 논의가 촉발되었다. 공동체는 더 건강해졌다.      


 이처럼 공동체의 다툼은 ‘나’와 ‘너’라는 ‘개인’들에게는 불편함과 불쾌함을 줄 수 있겠지만, ‘우리’라는 ‘공동체’에게는 언제나 건강함을 준다. 이 말을 개인보다 공동체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건강해지면 ‘성찬’과 ‘혜원’ 다음의 ‘성찬(나)’과 ‘혜원(너)’은 더 큰 유쾌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와 ‘너’가 조금 더 지혜롭다면 그 다툼이 그들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지도 않는다. 공동체의 다툼은 단독성의 마주침이기에 그것은 언제나 건강함이다.     



은근한 다툼은 우물에 독을 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해야 할 질문이 있다. “그럼 모든 다툼은 건강한가?” 아니다. 전선戰線이 명확한 다툼만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한다. 정직하게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드러내는 다툼만이 공동체의 건강함을 담보한다. 모든 다툼이 그런 것은 아니다. 전선이 명확히 하지 않는 다툼이 있다. 은근한 다툼이다. 이것은 공동체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여자는 야근을 안 하니까 승진이 늦지!” “놀고 있네. 남자들이 능력이 없어서 야근을 하는 거지!” 이런 다툼은 옳고 그름을 떠나 전선이 명확한 다툼이다. 둘의 다툼이기에 둘이서 해결난다. 공동체의 암으로 전이되지 않는다.      


 “혜빈아,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옷을 왜 그렇게 입었어.” 미소 뜬 얼굴로 하는 조언이다. 하지만 이것은 조언이 아니라 다툼이다. 은근한 다툼.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은근히 비아냥댄다. 곱씹어 듣지 않으면 비아냥이 아니라 마치 걱정을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옷도 꼭 지 같은 것만 입고 다니네.” 이런 다툼은 전선이 명확하지 않기에, 혜빈이는 어디서 어떻게 다투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 


 하지만 그 기묘한 짜증, 불쾌감, 불편함은 마음 한편에 남는다. 대상을 찾지 못한 부정적 감정은 엄한 것에서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그날 혜빈이는 자신이 산 옷 이야기를 하는 친구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내버렸다. 이렇게 전선이 명확하지 않기에 해소되지 못한 짜증, 불쾌감, 불편함은 애먼 사람을 향해 쏟아지게 된다. 그 부정적인 감정은 공동체 밑바닥에 남아 암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전이 된다.

   

 공동체의 은밀한 적이 있다. 그는 다투는 사람이 아니다. 은근하게 다투는 사람이다. 세련된 방식으로 비아냥대는 이들. 그들은 세련되게 비아냥되기에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서 은밀한 적이다. 그들이 공동체의 적이다. 그들은 아무도 없는 새벽에 마을의 우물에 독을 푸는 사람이다. 누가 먹게 될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먹게 되어 다치게 되는 독.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싶다면, 다툼 자체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은밀한 다툼을 문제 삼아야 한다. 다툼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지만, 은밀한 다툼은 공동체를 서서히 파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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