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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진짜 선물을 하는 방법

선물의 가치는 가난해지는 크기에 달려 있다.

선물, 쉽지 않다.

  

말이야 쉽지, 피한방울 안 섞인 남을 위해 선물을 준다는 것, 그러니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가난해진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생면부지의 남이 아니라 피붙이라도 하나를 해주면 하나를 받아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거래 논리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에게 이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어려운 진정한 선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조건 선물을 주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진짜 선물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보자. 서글프기는 하지만 이제 선물을 주는 것도 분명 노력과 연습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내가 사용했던 방법을 말해보자. 한 동안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줄 때, 그것을 선물로 주고자 연습하고 노력해야만 했다. 나 역시 자본주의에 찌들대로 찌든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대가없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가 않았다. 누군가에게 전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어떤 것을 그냥 주는 것도 물론 어려웠고, 그것을 줌으로써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방법을 조금 바꿨다.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까먹는 방법을 선택했다. 사실 ‘선물을 준다’는 행위에는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것까지 포함된다. 그러니까 ‘선물을 준다’는 행위에는 두 가지 행위가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실제적으로 그 선물을 주는 행위, 그리고 그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을 잊는 행위. 당연한 이야기다. 선물을 주고, 그 선물을 주었다는 것을 완전히 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선물의 대가를 바라지 않게 될 테니까. 주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반드시 대가를 바라게 마련이다. 그래서 선물을 줄 때, 그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까먹어버렸다.


무주상보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물을 준 것을 까먹어버리는 이 방법은 불교, 대승불교도들의 실천덕목 중 하나인 ‘무주상보시’라는 개념과 아주 흡사하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은 베푼다고 생각하고 베푸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베품이 아니라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얼마를 베풀었다는 의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곧 집착이 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베품(선물)은 베풀었다는 의식 자체를 갖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무주상보시’라는 어려운 말도 내용은 사실 별게 없다. 그냥 선물을 주고 그것을 빨리 까먹으란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도통한 스님도 아니고 속세에 사는 우리가 ‘선물을 준 것을 까먹으라!’는 말을 듣는다고 선물준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 방법을 현실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사전에 숙지해야 할 것이 있다. 한 번에 너무 큰 자발적 가난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발적 가난은 필연적으로 삶의 불편함을 초래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 번에 너무 큰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게 되면, 선물을 했다는 사실을 까먹을 수가 없다.      

 친구의 결혼 축의금으로 100만원을 낸다고 해보자. 그것이 선물이 되려면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 하는데, 만약 그 100만원이 머릿속에 계속 뱅뱅 돈다면 그것은 이미 선물이 아닌 셈이다. 자신이 결혼할 때 그 친구가 축의금을 얼마를 할지만 계속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진정한 선물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처음에는 선물할 때는 주고 나서 까먹을 수 있는 수준의 선물을 했다.

  

 시간의 양이든, 돈의 양이든 그 선물을 하고 난 이후에 잊어버릴 수 있는 수준의 선물을 했다. 그래야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아니 선물을 주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렸으니 대가를 바랄래야 바랄 수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이후 나는 까먹을 수 있는 선물의 질적, 양적 수준을 확장해왔다. 굳이 돈으로 환산해서 말하자면 처음에는 1만 원 짜리, 후에는 3만원, 나중에는 백만 원이 넘어가는 선물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선물의 가치는 가난해지는 정도에 달려 있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내가 돈을 더 많이 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점점 더 가난해졌음을 의미한다. 100만원을 벌 때 1만 원짜리 선물을 하는 것과 1000만 원 벌 때 10만 원 짜리 선물은 같은 선물이 아니다. 1만 원짜리 선물이 더 훌륭한 선물이다. 왜냐? 선물은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는 선택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00만원을 벌 때 친구에게 1만 원짜리 선물을 해주는 것이 1000만 원을 벌 때 10만 원짜리 선물을 해주 것보다 더 가난해지는 것이다.


 만약 선물이라는 것에 질적, 양적 수준이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것을 재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선물의 금전적 가치가 아니라 선물을 준 사람이 가난해지는 정도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일 테다. 그래서 재벌 총수의 몇 십억 기부보다 평생을 노점상을 했던 할머니의 천만 원 기부에 더 큰 감동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다 안다. 그 기부로 누가 더 가난해졌는지 말이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난 이후 자신이 가난해지는 만큼이 바로 그 선물의 질적, 양적 수준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그래서 참 다행이다. 늘 없이 사는 우리는 아주 손쉽게 재벌 총수보다 더 크고 높은 수준의 선물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내 목표는 선물의 양적, 질적 수준이 아니라 선물을 주는 대상의 확장이다. 예전에 내가 선물을 주었던 대상이 가족, 친구, 선후배 안에 있었다면, 이제 형편이 되는 한도 내에서 그 선물을 주는, 그리고 그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는 대상을 확장해나가고 싶다. 내 주위에 있는 혹은 주위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런 진정한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깜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자발적으로 가난해질 수 있는 그런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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