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 관습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최고의 의의意義는 가르쳐지지 않는다. 최고의 의의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열반은 증득證得되지 않는다."
《중론》, <관사제품> 나가르주나
사랑에 언어는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보다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 삶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쉴 새 없이 떠들어도(말) 관계는 늘 제자리이거나 심지어 퇴보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읽어대어도(글) 삶은 늘 제자리이거나 심지어 퇴보하기도 한다. 언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언어 너머의 것들로 전해지니까. 내가 좋아했던, 많은 철학자들이 언어의 덧없음을 이야기할 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언어-없음’으로 삶의 진실에 도달하려 했다.
사랑하는 이가 밤새 아플 때, “많이 아파?”라는 말 대신 그저 안고 병원으로 달렸다. 사랑하는 이에게 고마울 때, “고마워”라는 말 대신 일주일 노동으로 선물을 사주었다. 나는 그때 분명 ‘언어-없음’으로 삶의 진실을 보았다. 사랑은 안아주는 것이며, 함께 아파해주는 것이며, 고됨이 기쁨이 되는 것이라는 삶의 진실. 언어의 덧없음을 말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그들이 틀렸거나 아니면 적어도 놓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언어는 정말 무의미하고 그래서 덧없는 것일까? 그렇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전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밀도 높은 사랑의 관계에서만 그렇다는 사실이다. 깊게 사랑하는 이와는 언어가 필요 없다. 말없이 대화할 수 있다. 작은 떨림과 호흡, 몸짓, 표정으로 대화할 수 있다. 깊게 사랑하는 관계는 말하지 않아도 대화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의 눈빛과 호흡, 표정.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았을 때의 촉감. 사랑하는 이를 안았을 때 내 심장으로 전해져 오는 상대의 심장박동. 그것으로 그 어떤 많은 말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밀도 높은 사랑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묻자. 밀도 높은 사랑은 ‘창조’되는 것인가? 즉, 무無에서 유有가 되는 것인가? 사랑-없음의 사랑의 밀도를 0으로, 언어-없음으로 대화 가능한 사랑의 밀도를 100이라고 해보자. 0에서 한 사람을 만나 100이 되는 것인가?
사랑은 '사랑의 과정'이다.
세상만물이 그렇듯, 사랑 역시 ‘창조’가 아니다 . ‘생성’이다. 유有에서 유有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의 과정’ 자체다. 사랑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이 되어가는 것이다. 달리 말해, 사랑은 낮은 밀도의 사랑이 높은 밀도의 사랑이 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사랑의 과정’은 두 가지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첫째, 애초에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 둘째, 밀도 높은 사랑은 낮은 밀도의 사랑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언어의 덧없음을 주장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일종의 선민의식이다. “나는 밀도 높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언어는 무의미하다.” ‘언어의 무의미’에 관한 철학적 담론은 틀렸거나 놓친 것이 있다. 사랑을 ‘사랑의 과정’으로 보지 못했다면 틀린 것이고, 그것을 외면했다면 놓친 것이다. 밀도 높은 사랑에 언어는 불필요하다. 분명한 삶의 진실이다. 하지만 우리네 사랑은 언제나 '사랑의 과정'이다.
사랑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사랑-없음, 저밀도 사랑, 고밀도 사랑. 사랑의 과정은 저밀도에서 고밀도의 사랑으로 이행 과정이다. 이 '사랑의 과정'에서 언어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정보전달(의사전달, 지식습득)일까? 아니다. 그것은 사랑-없음의 언어다. 낮은 밀도의 사랑 역시 사랑이다. 이 사랑에는 언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정보 전달로서의 언어가 아니다. 그럼 어떤 언어일까?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언어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커플이 있다. 여자가 “커피 마실까?”라고 말한다. 그것은 ‘나는 지금 카페인이 땡긴다’는 정보전달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랑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라는 말이다. 낮은 밀도의 사랑에는 이런 언어가 필요하다. 개떡 같이 말했지만 찰떡 같이 알아듣는 언어. 그 언어가 반복되면 차이가 발생한다. 언어 너머의 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차이. 그 차이 나는 반복을 통해 언어-없음으로 대화할 수 있는 밀도 높은 사랑의 길이 열리게 된다.
사랑과 언어의 관계
사랑과 언어의 관계는 간명하다. 누군가와 정보전달(의사전달, 지식습득)의 이외에는 언어로 소통하고 싶지 않다면, 그 관계는 사랑-없음이다. “어제 뭐했어?” 라는 상대의 이야기에, 그 언어 뒤에 숨겨진 상대의 마음을 읽으려 하지 않고 “맨날 하는 말을 왜 또 하냐?” 마음이 든다면 그 관계는 사랑-없음이다. 그런 관계는 빨리 정리하는 게 좋다. 누군가 개떡같이 말했는데 찰떡 같이 알아듣게 된다면, 그 관계는 저밀도의 사랑이다. 즉,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언어 없이도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그 관계는 고밀도의 사랑이다.
누가 언어를 덧없으며 무의미하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오만함이며 무지함이며 비겁함이다. 세상에는 고밀도의 사랑만 있다고 말하는 오만함, 사랑은 ‘사랑의 과정’ 자체임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함, 말할 용기가 없는 자신을 은폐하기 위한 비겁함. 언어가 없다면, 사랑-없음의 관계를 확인할 수 없으며 고밀도의 사랑으로 가는 여정조차 시작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드러내기 두려워하는 비겁한 존재인지 역시 알길이 없다.
‘언어의 덧없음’의 진정한 의미는 오직 세 부류만 알고 있다. 사랑-없음의 관계를 모두 정리한 이들. 저밀도의 사랑 너머 고밀도의 사랑에 도달한 이들. 그리고 강건하게 자신을 드러낼 용기가 있는 이들. 그 외에 이들은 한동안 충분히 언어의 세계에 머물러야 한다. 말하고 쓰며 살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랑-없음을 관계를 정리해 나가고, 고밀의 사랑으로 나아가고, 자신을 드러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언제나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시작해야 하고, 그 시작은 언제나 한걸음이다. 우리가 오만해지고, 무지해지며, 비겁해지는 이유는, 넘어진 곳에서 시작하지 않으려 하고, 한걸음씩 걸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니까. 이것이 우리가 '언어의 덧없음'의 담론에 너무 쉽게 현혹되어서는 안되는 이유고, 언어의 세계에 충분히 머무르며 살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