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좋은 사람이 되는 이유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 질 들뢰즈&가타리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많은 철학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정의했죠. 거기에 제 나름의 사랑의 정의를 하나 더하고 싶어요. '사랑은 감정의 동조sympathy 현상’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어쩌면 이 정의가 모든 사랑의 정의를 관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누구와의 사랑이든, 어떤 사랑이든, 사랑을 하면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나 역시 좋아하게 되고,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나 역시 싫어하게 되니까 말이에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누군가와 사랑을 하죠. 달리 말해, 감정의 동조 현상을 겪게 되죠.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 되고,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현상을 겪게 되죠. 이제 왜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기쁨을 주려고 애를 쓰게 되는지 알 수 있죠. 너의 기쁨은 곧 나의 기쁨으로 동조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타심은 결국 이기심인 것이죠. 그런데 사랑하는 이에게 기쁨을 주는 것만으로 사랑의 밀도를 높여갈 수 있을까요.


사랑이 감정의 동조 현상이라면,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의 의무가 주어져요. 사랑하는 자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면 안 돼요.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윤리·도덕적인 차원의 촌스러운 논의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내가 사랑 하는 사람 역시 그 누군가를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미움은 슬픔이죠. 즉,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나는 사랑하는 이를 슬픔의 구렁텅이로 조금씩 몰아넣는 거예요.


사랑의 시작은 둘의 문제일 수 있지만, 사랑의 밀도와 지속은 둘의 문제가 아니에요. 둘을 둘러싼 모든 존재들의 문제에요. 내가 어떤 존재를 싫어하면 사랑하는 이도 그 존재를 싫어하게 되죠. 그렇게 서로에게 슬픔이 쌓이죠. 그 사이에 사랑은 밀도는 낮아지고 때로 변질되죠. 언제나 슬픔은 우리를 산산이 조각내니까요. 사랑한다면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싫어해서는 안돼요. 더 많은 이들을 사랑할 것. 그것이 사랑하는 자의 의무예요.


사랑의 변질, 소유욕은 사랑의 의무를 지키지 않은 자들에게 내려지는 벌인지도 몰라요.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들을 줄이지 않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늘리지 않음으로써 사랑을 지키려는 이들 있죠. "그 사람만 사랑하면 돼!" 그들은 결국-언제나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상대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려고 하게 마련이죠. 그렇게 상대를 슬픔에 빠지게 만들고, 그 슬픔는 나에게 되돌아 오게 되죠. 사랑은 감정의 동조현상이니까요. 그렇게 사랑은 휘발되죠.


사랑한다고 믿는 모든 이들은 되돌아 볼일이에요. 사랑하기 전보다 싫어하는 이들이 줄고, 좋아하는 이들이 늘었는지 말이에요. 자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그 사랑은 밀도가 낮은 거예요. 그리고 자신이 점점 좋은 사람이 되어간다면 그 사랑은 밀도가 높은 거예요. 조금 더 야박하게 말해, 자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지금 하는 사랑도 이제껏 했던 사랑도 유사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진짜 사랑을 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될 거예요. 또 진짜 사랑을 하고 싶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해요.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말이에요. 사랑하는 둘 사이를 둘러싼 세상 속에서 더 적게 미워하고 더 많이 사랑하는 좋은 사람이 되기! 그것이 사랑하는 자의 의무예요. 사랑에 익숙치 않은 이들은 이 사랑의 의무는 마음 깊이 담아 두어야 할 거예요. '나'와 '너'의 기쁨 넘치는 사랑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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