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합리성

'이왕이면'='사랑-없음'

우리를 합리적으로 변하게 할 합리성.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s. spinoza



'이왕이면' 이라는 합리적인 말


‘이왕이면’ 이보다 더 합리적인 말도 없다. “맛있으면서 이왕이면 값도 싸면 좋지.” “여행하면서 이왕이면 공부도 되면 좋지” “좋아하는 일하면서 이왕이면 돈도 벌면 좋지” 이처럼, 'A 이왕이면 B'는 A와 B 모두를 취하겠다는 의미다. ‘이왕이면’ 하는 선택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이런 합리성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왕이지 않은' 선택을 하는 이들은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맛있을 뿐 비싼, 여행만 하고 공부는 안 되는, 좋아하는 일을 할 뿐 돈을 못 버는 선택을 하는 이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왕이면’ 이보다 더 사랑을 왜곡하는 말도 없다. 죽기보다 싫은 학원에 아이를 내몰며 부모는 말한다. “이왕이면 공부를 잘 하는 게 좋아서 그런 거야” 여자 친구가 준비한 선물을 보며 남자 친구는 말한다. “이왕이면 내가 갖고 싶은 선물 사오지”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는 걸까? 남자는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걸까? 그들은 그렇다고 생각할 테다. 그들의 ‘이왕이면’ 앞에 생략된 말이 바로 “난 널 사랑하지만”이니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사랑은 사랑이고 공부는 공부이며, 사랑은 사랑이고 선물은 선물이니까. 이왕이면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이왕이면 내가 갖고 싶은 선물을 받고 싶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들에게 ‘이왕이면’ 하는 선택은 ‘사랑-없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다. 그들에게 사랑은 합리성이라는 토대 위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들에게는 합리성이라는 영토가 없다면 사랑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이왕이면=사랑-없음

하지만 ‘이왕이면’은 ‘사랑-없음’이다. 이는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A 이왕이면 B' 도식을 생각해보자. 이때 정말 A와 B를 동등한 가치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일까?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B다. “맛있으면서 이왕이면 값도 싸면 좋지.” “여행하면서 이왕이면 공부도 되면 좋지” “좋아하는 일하면서 이왕이면 돈도 벌면 좋지” 이 말에서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맛’보다 ‘값’이, ‘여행’보다 ‘공부’가, ‘좋아하는 일’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A 이왕이면 B’의 논의는 기만적이다. A는 가면이고 B는 맨얼굴이다. ‘이왕이면’의 논의는 B(맨얼굴)를 A(가면)로 숨기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왕이면’은 ‘사랑-없음’이다. “너를 사랑하지만 이왕이면 공부를 잘하는 게 좋잖아” “너를 사랑하지만 이왕이면 내가 갖고 싶은 선물이면 좋잖아” 이는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으로 공부·선물이라는 맨얼굴을 가리려는 것에 불과하다. 야박하게 말해, 여기에 사랑은 없다. 아이보다 공부가 중요하고, 연인보다 선물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사랑은 불편함이고 어리석음이다. 여자는 남자 친구가 힘들까 그의 집으로, 남자는 여자 친구가 힘들까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는 불편함. 그래서 길이 엇갈려 버리는 어리석음. 이것이 사랑이다. ‘이왕이면’ 찌든 이들은 이런 사랑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은 사랑조차 ‘이왕이면’ 편안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믿으니까. 그렇다면 사랑에 합리성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아니다. 사랑에도 합리성이 있다.



사랑은 합리성 너머의 합리성


사랑은 합리성이라는 토대 위에 살지 않는다. 합리성이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 산다.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 사는 합리성. 이것이 사랑의 합리성이다. 아이가 학원을 빼먹고 오락을 하고 있을 때, “학원이 어지간히 싫었나보구나”라고 이해‘되는’ 합리성. 여자 친구가 사온 선물을 보며, “이걸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라고 이해‘되는’ 합리성. 서로를 배려하다 길이 엇갈렸을 때,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아끼고 있구나”라고 이해‘되는’ 합리성. 이런 합리성만이 사랑의 합리성이다.


이 사랑의 합리성이 지속될 때 사랑하는 이는 변하게 된다. 이해‘되는’ 합리성은 한 사람을 변하게 한다. 한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생각이 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감성이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가 이해되면, 학원을 빼먹는 아이도 사랑스러워 보인다. 여자 친구가 이해되면, 그녀가 선물 해준 넥타이도 근사해 보인다. 사랑하는 만나기 전에는 밉고, 촌스럽고, 멍청하게 짝이 없어 보이는 일들이 한 없이 사랑스럽고, 근사하고, 아름다워 보이게 된다.


사랑은 합리적이다. 다만 그 합리성은 지금의 합리성 너머의 합리성일 뿐이다. 우리를 합리적으로 변하게 할 합리성.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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