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미움의 반대 감정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하지 않던가. ‘사랑하는 이를 미워한다.’ 이는 사랑이 말라버린 자리에 미움이 들어 찬 것이지, 사랑하는 이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서 미움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미워하게 되는 유일한 경우가 있다. 바로 사랑하는 이, 그 자신이 스스로를 미워할 때다.
‘민재’는 ‘문주’를 사랑한다. 그런데 ‘유리’가 ‘문주’를 미워한다. 그때 ‘민재’는 ‘유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미워하는 하는 이는 미워할 수밖에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문주'는 '민재'에게 기쁨을 준다. '민재'는 '문주'를 더 기쁘게 해주고 싶다. '문주'의 기쁨이 '민재'의 기쁨이니까. 누군가 ‘문주’를 미워한다면 ‘문주’는 슬픔에 빠진다. ‘문주’의 슬픔은 ‘민재’의 슬픔이다. 그러니 ‘민재’는 ‘문주’를 미워하는 ‘유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유리, 너 한 번만 더 문주한테 상처 주면 가만 안둘 거야!” ‘민재’는 ‘문주’를 지키고 싶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고 싶다. 그래서 민재는 ‘유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민재'와 '문주'의 사랑은 더욱 단단해진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이는 미워한다. 사랑과 미움의 문제는 이렇게 간명하다. 하지만 사랑과 미움의 문제가 복잡하고 미묘해질 때가 있다.
“나는 잘하는 것도 없고 끈기도 없어.” ‘문주’가 부쩍 많이 하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민재'는 미묘한 슬픔에 빠진다. 그 슬픔은 동정도 연민도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 미묘한 슬픔은 뭔가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슬픔이다. 그 슬픔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이유는, 사랑하는 이가 미워졌기에 발생한 슬픔이기 때문이다. '민재'는 '문주'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미워할 수밖에 없다. '민재'는 '문주'를 사랑하니까.
그런데, ‘문주’가 문주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 그럼 ‘민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재’는 ‘문주’를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할 수밖에 없다. '민재'가 사랑하는 '문주'를 미워하는 것이 '문주'니까. '민재'는 '문주'를 슬픔에 빠뜨리는 존재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다. 그런데 그 존재가 바로 '문주'라니. 이것이 '민재'가 자기비하에 빠진 '문주'를 보며 미묘하고 혼란스러운 슬픔에 빠졌던 이유다.
사랑하는 이가 미워질 때는 오직 한 경우 밖에 없다. 사랑하는 이가 자기비하에 빠졌을 때. '민재'는 문주를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사랑과 미움의 동시적 사건에서 미움을 덜어 낼 수 있을까? 그것은 '민재'에게 달려 있다. '민재'가 '문주'를 더 깊이 사랑해주면 된다. 그래서 '문주'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스스로 깨달으면 된다. 그때 '문주'의 자기비하는 점점 줄어들고 그와 동시에 '민재'의 미움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문주'의 사랑에 따라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아무에게나 사랑받는다고 자기비하가 옅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자기비하가 옅어진다. '문주'가 '민재'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자기비하는 계속될 테다. 문주 자신의 모습만 볼 뿐, 민재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이지 않을 테니.
반대로, '문주'가 '민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문주'는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민재'의 눈빛이 보일 테다. 그렇게 '문주'의 자기비하는 옅어지고 동시에 사랑은 더 단단해질 테다. 사랑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우리는 그 끝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바랄 뿐이다. '민재'가 '문주'를 더 사랑해주기를. 그리고 '문주'가 '민재'의 사랑을 볼 수 있기를. 그렇게 사랑에서 미움을 덜어낼 수 있기를. 그렇게 사랑이 더 단단해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