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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무게

‘기쁨을 가까이하고 슬픔을 멀리 해야 한다.’ 건강한 삶을 바라는 이들에게 이것보다 우선 하는 삶의 원칙은 없다. 이 원칙을 따르지 않을 때 삶은 조금씩 시들어 가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 원칙을 충실히 따르면 아무 문제가 없을까? 달리 말해, 슬픔은 멀리 두고 기쁨만을 쫓으면 활짝 꽃피우는 삶이 펼쳐질까? 분명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는 답만큼이나 ‘그렇다’고 답하기까지의 여정 역시 중요하다. 그 과정까지 우리네 삶인 까닭이다.

 

 기쁨을 주는 노래를 하기 위해 슬픔을 주는 직장을 때려 치면 건강한 삶이 펼쳐질까? 분명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답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있다. 그 과정은 ‘기쁨의 무게’를 견디는 시간이다. 이 기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자는 기쁨을 쫒다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노래하기 위해 직장을 때려 친 이는 기쁠까? 그렇다. 단, 기쁨의 무게를 견디는 동안만 기쁘다. 그에게 기쁨의 무게는 무엇인가?

     

 사라져 버린 소속감. 하루가 다르게 비어가는 통장잔고. 세상 사람들의 기묘한 시선. 그 모든 것들이 뒤엉켜 불현 듯 닥쳐오는 불안감. 이 기쁨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는 과정 안에서만 기쁠 수 있다. 이 기쁨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 그 기쁨은 순식간에 슬픔이 되어 그를 짓누르게 된다. 기쁨을 쫓는 자는 ‘기쁨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문제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기쁨의 무게가 얼마인지 닥치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한걸음이다. 진정으로 기쁨을 쫓고 싶다면, 멈춰서도 안되고 정신없이 달려서도 안 된다. 둘 모두 슬픔에 휩싸인다. 전자는 슬픔(기쁨-없음)에 나락에 떨어져서, 후자는 슬픔(기쁨의 무게)의 짓눌려서. 기쁨을 가까이하고 슬픔을 멀리하려는 사람은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한 걸음을 딛고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또 한 걸음을 내딛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기쁨의 무게를 견디는 근육을 키워가야 한다. 때로 더뎌 보이고, 때로 비겁해보이는 그 한걸음을 긍정해야 한다. 


 기쁨을 따르고 슬픔을 멀리 해야 한다는 말의 진의를 아프게 되새겨 볼일 이다. 기쁨을 쫒으려는 자의 실존적 질문이 남겨진다. “기쁨과 기쁨의 무게 사이 어디 즈음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우리의 한걸음은 그 균형점 사이를 횡단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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