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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제 멋대로 살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슬픔'의 기원은 피해의식이다. 이것이 '기쁨'의 시작이 피해의식과의 단절이어야 하는 이유다.



혼자 사는 삶은 없다. 우리는 좋든 싫든 함께 산다. 삶이 함께 사는 삶이라면, 우리에게는 네 가지 삶이 주어진다. 그 네 가지 삶은 각각 ‘독재자’, ‘피해자’, ‘수도자’, ‘자유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독재자’가 함께 사는 방식은 무엇인가? “나는 하지만 넌 하지 마!” 이것이 ‘독재자’가 함께 사는 방법이다. 자신은 매일 자정을 넘어서 들어오지만 자식들이 늦게 들어오는 것이 용납하지 못하는 아버지. 자신은 온갖 편법과 위법을 저지르면서 법대로 살라고 외치는 정치인. 이런 ‘독재자’들의 함께 사는 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독재자와 함께 사는 사람도, 독재자 자신도 결국은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피해자’가 함께 사는 방식은 무엇인가? “나도 하지 않을 테니 너도 하지 마!” 이것이 ‘피해자’가 함께 사는 방법이다. "나도 돈을 쓰지 않을 테니 너도 쓰지 말라"고 말하는 어머니. "나도 선물을 받지 않을 테니 너도 선물 받으려 하지 말라"는 친구. 이들은 모두 안쓰러운 '피해자'들이다. 깊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피해자들은 함께 사는 이들에게 종종 '자신도 하지 않을 테니 너희들로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삶의 방식 역시 자신과 주변 사람 모두를 슬픔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수도자’가 함께 사는 방식은 무엇인가? “나는 하지 않지만 너는 해도 돼!” 이것이 '수도자'가 함께 사는 방법이다. "나는 고통스럽게 살았지만 너는 즐겁게 살라"고 말하는 부모. "네가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은 내가 벌게"라고 말하는 연인. 이들은 기쁨을 주는가? 언뜻 그런 것도 같다. ‘수도자’ 자신은 몰라도, 적어도 그 수도자와 함께 사는 이들은 기쁨을 느낄 것 도 같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수도자의 삶 역시 모두를 슬픔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을.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던 어머니가 있다. 이유는 하나다. 자식이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서. 아이는 기쁠까? 결코 아니다. 아이는 안다. 자신의 기쁨이 어머니의 슬픔 안에서 누렸던 기쁨이었음을. 누군가의 슬픔 안에서 누렸던 기쁨은 작게는 부채감이, 크게는 죄책감이 된다. 그 부채감 혹은 죄책감은 불행(슬픔)에서 편안함을, 행복(기쁨)에서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것은 최악의 슬픔이다. 불행에서 편안함을, 행복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는 기쁨을 향한 여정을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까닭이다. 

    

 함께 사는 삶의 진정한 기쁨은 ‘자유인’에게만 허락된다. ‘자유인’이 함께 사는 방식은 무엇일까? “나도 할 테니 너도 해도 돼!” 화가인 어머니를 둔 사람을 알고 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릴 때 더 없이 기쁨을 느낀다. 그 기쁨에 취해 때로 아이에게 관심을 주지 못하기도 했다. 아이는 슬픔에 빠졌을까? “서운한 적이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눈은 맑고 강건했다. 서른이 넘은 그는 자신의 삶에서 충분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기쁨이 넘치는 아이로 키우는 방법은 간명하다. 부모가 기쁜 삶을 살면 된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것은 무책임이거나 방종이 아니냐고. 다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 가정(사회)이 파탄나는 것 아니냐고. 한 번도 ‘자유인’의 삶을 긍정해본 적이 없는 이들의 질문이다. 그들은 ‘독재자’ 혹은 ‘피해자’ 아니면, ‘수도자’의 삶만을 긍정하며 살아왔던 이들이다. 진정한 기쁨은 오직 기쁨으로만 잉태된다. 슬픔으로 잉태된 기쁨은 기형적 기쁨(죄책감으로서의 효도, 부채감으로서의 연애)이 되게 마련이다. 


 진정으로 기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맑고 강건하다. 맑고 강건한 이들만이 타인들에게 기쁜 삶을 열어줄 수 있다. 물론 자신의 기쁨을 찾아가는 삶이 당장은 함께 하는 이들에게 작고 가벼운 슬픔(가난 혹은 정서적 상처)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길게는 타인들에게 크고 깊은 기쁨 (자신의 욕망과 감정의 긍정!)으로 반드시 되돌아 간다. 충분히 기쁜 이들만이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해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희생하고 참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보다 어리석은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힘껏 자신의 기쁨을 찾고 누리며 살아야 한다. 자신의 기쁨 넘치는 삶을 위해서도, 함께 하는 소중한 이들에게 기쁨을 선물해주기 위해서도 우리는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도 할 테니, 너도 해도 돼!" 이 한 마디가 '나'와 '너' 모두를 기쁜 삶을 인도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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