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나래 칼럼]기록되지 않는 자들의 기록

1.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 그리고 문화재들에 관계된 바로 그 야만이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는 문화재들의 전승과정에도 똑같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역사적 유물론자들은 가능한 그런 전승에서 비켜선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여긴다.” 『역사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수업이 나를 글로 '기록'해야겠단 의무감으로 이끌었다. 막상 수업에서 느꼈던 생각들을 글로 어떻게 써야하는지 시작부터 좀 망설여졌다. 나는 나를 주어로 두고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 자체가 낯설고 서툴다.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내 이야기는 하찮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상대가 굳이 궁금해하지 않을텐데 하는 마음.


나에게 덕지덕지 붙어있는 약자(억압받는 자)의 모습들이 있다. 나는 나의 이러한 부분들을 긍정하지 못한 채 모순적이게도 강자(억압한 자)의 시선이 내 안에 들어와 나의 입을 틀어 막았던 것 같다. 그저그런 얼굴의 나, 덩치있는 나, 재미없는 나, 조용한 나, 이백충의 나, 전문대의 나 등등. 어렸을 때부터 쌓이고 쌓여 수북하게 쌓인 먼지와 같은 무색의 나는 화려한 장신구들에 치장한 타인들을 보며 항상 더 구석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진짜 정말 다행이게도, (이건 정말 운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데) 수북히 뒤덮인 먼지 너머, 그 먼지를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분들을 만났다. 화려한 장신구 없이 그 자체로 충분히 매혹적인 '아우라'가 있는 분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며 그들을 닮고 싶은 마음에, 지금은 나의 먼지들을 스스로 조금씩 덜어내는 과정 중에 있는 것 같다.


2.

“역사가가 누구에게 감정이입하는지 자문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대답은 두말할 나위 없이 승리자에게 감정이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배하는 자는 누구든 모든 승리자들의 후예들이다. 결과적으로 승리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늘 지배하는 누구에게든 도움이 된다. (중략) 지금까지 승리를 거뒀던 자라면 누구든 오늘의 지배자들이 오늘의 패배자들의 몸을 짓밟고 행진하는 개선 행렬에 합류하는 셈이다.” 『역사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선생님은 기록은 언제나 강자의 기록이며 약자는 기록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덧붙여 어느 철학 매거진에서, 기록되지 않는 자들의 기록으로 시장에서 지짐 부치는 할머니들의 말들을 기록했다는이야기를 해주었다. "우와, 멋지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업의 예시가 아닌 내가 우연히 그 글을 접한다면 '뭐야 기승전결도 없고 의미없어 보이는 이건 뭐지' 이 생각을 했었을 거다.


몇년 전에 커뮤니티에 이부진이 세타필 로션을 카트에 담긴 사진이 올라왔다. '재벌이 소박한 거 쓰네?', '이부진이 선택할정도로 세타필이 그리 좋은가?'라는 댓글이 달렸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었던 게 떠올랐다. (그 사진 본 이후에 나도 세타필을 사서 썼었다.) 지짐 할머니와 함께 이전의 상반된 경우와 생각이 떠오르면서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강자를 선망의 대상으로 당연시 여겼구나" 이것 이외에 어쩌면 인지조차 못하는 지점들이 있을까봐 두렵기도 했다.


그리고 약자는 기록할 힘도 시간도 능력도 없다는 말에 과거의 어느 순간 순간들에 침묵했던 내가 보여서 눈물이 찡했다. "누구나 다 이래", "너만 이러는 거 아니야", "너보다 심한 사람들도 많아", "그런 거 생각할 겨를이 어딨어" 등등. 내 생각과 입들을 틀어막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이런 생각들이 아직도 상흔처럼 남아 있어서 그런지, 아직도 나는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망설여진다. 아직 갈 길이 너무나도 멀다.


벤야민 수업 이후 수업 내용들이 머리 속에 동동 떠다녔다. 이것저것 많았던 것 같았는데 막상 쓰고 보니 별거 없는 거 같아 머쓱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마저도 쓰지 않으면 어느 순간 다 날아가버린다는 걸 안다. 이건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어서 기록한다. 벤야민의 말처럼,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라는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오늘 퇴근 후 집으로 가는 길을 평소와 다른 길로 갔다. 집근처에 놀이터가 있는 줄 몰랐는데 놀이터가 있어 괜히 신기하고 반가웠다. 바람이 좋아 조금 앉아 있고 싶어서 그네에 앉았다. 놀이터에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 2명이 놀이터에 놀고 있었다. 너무 해맑게 놀고 있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그 아이들을 빤히 보았다. '문득 그 저녁시간에 왜 너희는 여기서 이 시간까지 놀고 있냐고 위험하게' 이 생각이 들자마자 눈물이 쫌 났다. 너희는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유쾌하게 놀 수 있었음 좋겠다.




손나래

-철학흥신소 비밀 요원.

-철학흥신소 최강 인자강 (크로스 핏 마스터 하고 요즘 역도까지 배운다!)

-요새 글 쫌 씀(예전에는 엉망이었음)

-요새 철학 쫌 함(예전에는 수업시간 졸았음)

-자기긍정 중(자기부정 막 탈피)

-느리지만 꾸준히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음

-현재, 외로움을 즐기고 있음(남자친구 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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