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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밖에 모르는 이

'자기 밖에 모르는 이'가 있다. 그는 온통 자기 생각뿐이기에, 자신이 원해서 했던 일도 남을 위해 희생한 것이라 믿는다. 그는 온통 자기 생각뿐이기에,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질투하고 시기한다. 그는 온통 자기 생각뿐이기에, 주변을 둘러볼 여력도 관심도 없다. 주변을 둘러본다면 그것은 정서적이든, 육체적이든, 경제적이든,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했을 때뿐이다. 그는 온통 자기 생각뿐이기에, 자기 고민만 할 뿐 누군가 자신의 고민에 대해 자신보다 더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는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사실은 자신이 원해서 했던 일을 희생이라 여기는 이들 만큼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이는 없다. 언제나 질투하고 시기할 준비가 된 이들만큼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이는 없다. 정서적, 신체적,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만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들만큼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이는 없다. 자기 고민밖에 보이지 않아서 자신의 고민에 대해서 자신보다 더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이들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이는 없다.

     

 분명 '그런 이'는,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이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보다 자신의 손익을 따지고 있을 테다. 그런 이는 결국 또 자기 밖에 모르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해해보려 했다. 태어날 때부터, 자기 너머까지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이의 기쁨에서 나 역시 기쁨을, 그런 이의 슬픔에서 나 역시 슬픔을 느낀 시간 동안에 그랬다. 하지만 이제 지쳤다.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이'가 싫다. '그런 이'의 기쁨이 내게 슬픔이고, 그런 이의 슬픔이 내게 기쁨이 되어 버렸다.

 

 '자기 밖에 모르는 마음'은 강력한 전염병이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의 곁에 있는 사람은, 그 역시 자신 밖에 모르게 된다. 그래서 자기 밖에 모르는 이는 자신이 자신 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은밀히 감춰두려 하는 것이겠지.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밖에 모르는 마음을 유지하는 데 더 도움이 되니까. 이제 알겠다. '그런 이'가 왜 싫어졌는지. 자신 밖에 모르는 이들로 인해 지쳐버려서 그 전염병을 이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다른 사람들 신경 써야 돼. 내 것만 챙기면 되지” 내가 그토록 멀리 하려했던, 그 전염병이 내게도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자신 밖에 모르는 이'가 싫어진 이유는, 그를 사랑하려하다가 지쳐버려, 나 역시 조금씩 자신 밖에 모르는 이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가 싫은 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싫어지고 있는 거였다. 내가 '그런 이'의 전염병을 치유해줄 정도로 강건했으면 좋았으려만. 아니 그 전염병을 자가치유할 정도로 강건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어쩌랴. 이미 지쳐버린 것을. 지금의 내가 여기인 것을. 좋든, 싫든 지금의 나를 긍정할 수밖에 없다. 주제 넘게 성숙한 척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가장 큰 미성숙임 알만큼은 성숙하니까. 나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 밖에 모르는 이'가 되고 싶지 않다. '나'를 넘어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를 헤아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나 역시 '자신 밖에 모르는 이'가 될 수밖에 없다. 주제 넘게  '자신 밖에 모르는 이' 곁에 계속 있다간, '자신 밖에 모르는 이'의 고민에 대해 계속 고민하다간, 나 역시 그리 될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제, 당분간, '자신 밖에 모르는 이'에 대한 기대와 애정을 거두고 그런 이를 멀리 하려 한다. 아프고 미안해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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