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이들은 누군가와 진정한 관계를 맺기 어렵다. 우리는 흔히,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면 친구도 많아지고 인간관계도 돈독해질 것이라 믿는다. 달리 말해, ‘나’를 희생하는 만큼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보다 심각한 착각도 없다. 이는 ‘나’와 ‘타인’이라는 두 측면에서 고찰하면 분명히 알게 된다.
‘나’라는 측면부터 이야기해보자. ‘나’가 무언가를 희생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된다고 해보자. 그때 ‘나’는 그 누군가와 진정한 관계를 맺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대리는 직장 동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있을까? 아니다. 그는 늘 웃고 있지만 자신에게 일을 떠넘기는 동료들을 은근히 미워하고 있다. 미워하는 이와 진정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인’이라는 측면도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타인’에게 잘해주는 만큼 그 ‘타인’도 우리에게 잘 해주리라고 믿는다. 그렇게 그 ‘타인’과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믿음은 예외적인 믿음일 뿐 보편적인 믿음은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잘해주려고 애를 쓸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그 진심을 알아주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를 희생해가면서까지 누군가에게 잘해주려고 할 때 우리의 그 희생을 알아주고 그에 대해 보답하려는 사람은 오직 성숙한 사람들뿐이다. 그리고 그런 성숙한 사람은 아주 드물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는 자신이 준 것은 대단한 것으로, 받은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미숙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동료들은 이 대리를 노고를 알아줄까? 야근을 불사하고 동료의 일을 도와주는 이 대리다. 물론 앞에서는 ‘이 대리는 사람이 너무 좋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돌아서서는 ‘다음에 일 많으면 또 부탁해야지’라고 은근히 바라는 것이 이 대리의 동료들이다. 이것은 비단 이 대리가 처한 현실이기만 할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적나라한 우리네 현실이기도 하다.
‘자신보다 남에게 더 좋은’ 소심한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 희생하는 ‘나’는 주변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우리 주변에는 나의 희생을 이용하려 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너’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항상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소심함은 언제나 그 끝이 좋지 못하다.
소심했던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자. 정신없이 바쁠 때조차 주변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적은 없었을까? 슬프고 아픈 일이 있어도 주변 사람들 앞에서는 즐거운 척 연기를 한 적은 없었을까?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무던히 애를 썼던 그 과정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관계를 얻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테다. 그 사람은 무엇인가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다시 나를 찾았을 것이고, 그 사람은 내가 슬프고 아픈 일이 있어도 즐거운 이야기를 하기를 바랄 테다.
그렇다고 해도 상대만을 원망할 필요는 없다. 헛헛한 관계가 발생했다면, 우리의 소심함이 그 원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관계의 시작은 가장 먼저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타인을 미워하게 되거나 혹은 타인이 우리를 이용하거나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헛헛한 관계의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소심함은 이토록 유해하다.
소심함은 무엇인가? 언제나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이다. 자신보다 남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려는 정도만큼이 우리의 소심함의 정도다. ‘나’를 외면하고 타인을 우선하는 만큼이 바로의 우리의 소심함이다. 자신에게 그런 소심함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기 전에 스스로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이려고 노력했는가?” 소심함에서 벗어나려면, 그리고 주변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가장 먼저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