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걱정의 괴로움
“아저씨 저희 지금 줄 서 있는 거 안보이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경아’와 ‘선화’는 커피를 사려고 줄을 서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덩치 큰 남자가 은근슬쩍 새치기를 하려는 것 아닌가. ‘경아’는 얌체 같은 남자에게 한 마디를 쏘아 붙였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죄송하다고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작은 소동이 있은 후, ‘경아’와 ‘선화’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고 그 작은 소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아야, 아까 너 왜 그랬어?”
“뭐?”
“새치기한 사람한테 짜증내듯이 말한 거 말이야?”
“얌체 같아서 괘씸하잖아.”
“그러다가 싸움나면 어쩌려고?”
“그런 걸로 무슨 싸움이나? 그냥 새치기 하지 말라고 말한 건데.”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나중에 밤에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선화’는 ‘경아’가 그 남자에게 쏘아붙이며 한 마디를 할 때 가슴이 철렁했다. ‘선화’는 어제도 마트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혹시 자신이 내 뱉은 한 마디 때문에 해코지를 당하거나, 혹은 상대가 흉악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선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아니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느라 부조리하고 억울한 일 앞에서 아무 말 못했다.
‘태호’는 직장에서 온갖 억울한 일을 당하지만 말 한마디 못한다. “그 꼴을 당하고 왜 말 한마디 못하세요?” 보다 못한 동료가 ‘태호’에게 물었다. “괜히 그런 말하다가 직장에서 잘려서 노숙자가 되면 어떻게 해요” ‘태호’ 역시 ‘선화’와 마찬가지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아니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걱정하느라 부조리하고 억울한 일 앞에서 아무 말 못했다. 비단 ‘선화’와 ‘태호’만 그럴까?
소심함, 불행에 관한 과도한 상상력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흔하다. 유행성 전염병 때문에 아예 외출을 하지 않는 이들. 강도를 만날까 두려워 택시를 타지 못하는 이들. 사고가 날까봐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는 이들. 이런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소심함이 무엇인지 또 하나의 정의를 더할 수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하는 마음. 이것이 소심함이다.
‘선화’와 ‘태호’는 소심하다. 이는 단순히 부조리하고 억울한 상황 앞에서 할 말을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다. 혹여 강도를 만날까 택시를 타는 것을 꺼리는 이, 혹시 전염병에 걸릴까 외출을 꺼리는 이, 혹여 불의의 사고가 날까 여행을 꺼리는 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하는 이들은 모두 소심하다. 이런 소심함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소심한 이들의 특징이 하나 있다. 불행에 관한 상상력이 과도하게 발달해 있다는 점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나지 않을 불행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자신에게 펼쳐질 수 있는,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 확률이 거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마치 당장 일어날 것처럼 상상한다. 이제 소심함을 다시 간명하게 정의할 수 있다. 불행에 관한 과도한 상상력.
‘기쁨’과 ‘슬픔’, 그리고 ‘행복’과 ‘불행’
그런데 어찌 보면 이런 소심함은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혹시나 일어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조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소심한 이들의 입버릇처럼 ‘조심해서 나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불행하다. 불행이 무엇인가? 슬픔에 잠식당한 상태다. 반대로, 행복은 기쁨이 충만한 상태다. 문제는 어떤 삶이든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다는 데 있다. 기쁨뿐인 삶도 없고, 슬픔뿐인 삶도 없다.
그렇다면 행복과 불행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행복은 삶에 혼재한 기쁨과 슬픔 중 기쁨에 시선을 두는 일이고, 불행은 슬픔을 시선을 두는 일이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에 들 수는 없다. 연인의 멋진 몸은 내게 기쁨을 주지만, 그가 운동하러 가는 시간 동안 혼자 있어야 하는 것은 슬픔이다. 행복은 그의 멋진 몸(기쁨)에 시선을 두는 일이고, 불행은 혼자 있는 시간(슬픔)에 시선을 두는 일이다.
‘행복-불행’의 차이는 ‘기쁨-슬픔’의 크기 차이라기보다, ‘기쁨-슬픔’을 바라보는 시선 차이에 가깝다. 이 삶의 진실에 비추어 ‘불행에 관한 과도한 상상력’이라는 소심함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들은 필연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슬픔을 주는 상황에만 시선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외출을 하면 유행성 전염병에 걸릴 수도 있지만, 즐거운 만남이 있을 수도 있다. 택시를 타면 강도를 만날 수도 있지만, 편안하게 집에 갈 수도 있다. 여행을 가면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지만 유쾌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심한 이들은, ‘즐거운 만남‧편안한 귀가길‧유쾌한 경험’(기쁨)에 시선을 두지 않고, ‘전염병‧강도‧사고’(슬픔)에 시선이 쏠려 있다. 그러니 어찌 이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 소심한 이들은 불행을 피하려 불행을 상상한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그들의 머릿속에 온통 불행에 대한 생각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런 부류의 소심함은 어리석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소심함 이들의 불행한 행복
어떤 인생이든 불확실하다. 그것이 삶의 본질이다. 그러니 삶을 잘살아내려면 최소한 확률이라도 잘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찬찬히 계산해보라. ‘기쁨’(신나는 일‧편안한 귀가길‧유쾌한 경험)을 누릴 확률과 ‘슬픔’(전염병‧강도‧불의의 사고)을 당할 확률 중 어느 쪽이 더 높을까? 압도적인 차이로, 전자의 확률이 높다. 후자는 천재지변을 당할 확률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다.
외출을 해도 전염병에 걸릴 확률은 매우 낮다. 반면 즐거운 만남이 있을 확률은 그보다는 높다. 택시를 타도 강도를 만날 확률은 매우 낮다. 반면 편안하게 귀가를 확률은 그보다 높다. 여행을 가도 불의의 사고를 당할 확률은 매우 낮다. 반면 유쾌한 경험을 할 확률은 그보다는 높다. 그러니 어느 쪽에 배팅하는 것이 합리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불확실한 인생에서 희박한 확률에 배팅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소심한 이들이 이 단순한 확률을 합리적으로 계산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불행에 관한 과도한 상상력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러다 전염병 걸리면 어쩔 건데” “그러다 강도 만나면 어쩔 건데” “그러다 사고 나면 어쩔 건데”라는 생각만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심한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기껏해야 (일어나지 않을) 불행을 피하는 일이다. 이 얼마나 불행한 행복이란 말인가?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면 이 질문이 필요하다. “나는 불행에 관한 상상력이 얼마나 과도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