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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없기를 바라지 말라.

'누빔점'은 무엇인가?

"삶은 고통의 바다다." 이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누빔점(point  of  caption)’ 라캉의 정신분석학 개념 중 하나이다. 누빔점은 소파나 방석에서 바깥 면(천)과 안쪽 면(쿠션)이 헛돌지 않게 하는 박음질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이 ‘누빔점’은 무엇일까? 바로 아버지의 금지 혹은 금지로부터 발생하는 억압이다. 원초적인 금지는 아이에게 엄마를 금지하는 일이다. (“엄마한테서 떨어져!”) 이 원초적인 금지는 아이가 자라면서 갖가지 금지와 억압으로 파생되고 분화된다. (“말대답하지 마!” “팬티에 손 넣지 마!” “오락하지 마!” “누워 있지 마!”) 이 누빔점은 (말하고 싶은, 팬티에 손 넣고 싶은, 오락하고 싶은, 누워있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금지하고 억압하는 원인이다.      


 '누비점'이 박힌 아이가 어른이 되면, 부모의 금지의 목소리는 내면화된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말대답을 하지 않게 되고, 팬티에 손을 넣지 않게 되고, 오락을 하지 않게 되고, 누워있지 않게 된다. 동시에 말대답을 하게 되면, 팬티에 손을 넣게 되면, 오락을 하게 되면, 누워있게 되면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된다. 이것이 우리네 삶의 고통의 중핵이다. 욕망을 금지할 때 편안하고, 욕망을 만족하려 할 때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고통의 근원 아닌가. 말하자면, 누빔점이 우리네 삶의 고통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누빔점’ 자체를 거부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 고통을 제거하고 싶을 테니까 말이다. 정신분석학을 ‘제대로’ 공부한 이들이 가장 처음 겪는 반응이 부모에 대한 원망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바람처럼, 누빔점을 거부하면 즉 부모가 어떤 요구나 금지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통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라캉에 따르면, ‘누빔점’이 ‘정신병’과 ‘정인’(이를 라캉은 ‘신경증’자라고 한다.)들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쉽게 말해, 언어를 배워가는 유아 시절, 부모가 어떤 요구나 금지도 하지 않아서, 어떤 억압도 없이 자란 이는 ‘정신병’자가 된다.    

 

 이것이 ‘누빔점’(부모의 금지)을 누빔점(외피와 내피를 고정하는 박음질)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누빔점이 없는 방석은 고정되지 않아서 끊임없이 외피가 내피가 헛돌 듯, ‘누빔점’이 없는 아이는 언어(기표)와 대상(기의)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 정신이 끊임없이 헛돌게 된다. (“나는 어제 신의 계시를 받았다!”) 우리는 ‘누빔점’(고통의 원인)이 박혔기 때문에 정신병을 피할 수 있었다. 라캉의 세계는 차갑다. 고통스러운 정상인(신경증)과 고통 없는 정신병자만이 있기 때문이다. (라캉에 따르면, ‘신경증’와 ‘정신병’ 사이에 ‘도착증’이 있다.)

     

 ‘누빔점’이 고통의 원인이다. 하지만 그 고통(혹은 고통의 원인)이 바로 정상인(신경증)의 조건이 된다. 이것은 비단 정신분석학에서만의 통용되는 사실이 아니다. 인간은 언제 인간이 되는가? 즉, 정자와 난자가 만나 착상을 형성할 때부터 출산하는 과정 중 어느 시기부터를 인간으로 볼 것이냐는 현대 윤리학의 가장 첨예한 쟁점 중 하나이다. 이 중 설득력 있는 이론은, 고통의 유무로 ‘인간’을 정의하는 관점이다.       


 생명과학에 따르면, 인간은 임신 약 18주 이전에는 대뇌피질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서 그 속에 시냅스 연결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어른이 느끼는 고통의 자극이 18주 이전의 태아에게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시기는 단순 존재(잠재적 인간)이고,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인간으로 규정한다. 쉽게 말해,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인간이라 말할 수 없고,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의미다. 이런 윤리학적 관점을 지지한다면, 고통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 셈이다.      


 고통은 슬픔인가? 그렇다. 고통은 우리에게 갖가지 슬픔을 준다. 그렇다면 고통이 없으면 좋은가? 아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고통이 바로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고통-없음은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무無다.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텅 빈 암흑이다. 역설적이게도, 기쁨은 고통으로부터 온다. 


 고통스러운(답답한) 집이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집이 없는 여행은 혼란스러운 방황일 뿐이다. 고통스러운(내 마음처럼 안되는) 타자를 온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고통스러운 타자가 없다면 끝없는 외로움뿐이다. 고통스러운(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삶이 있기 때문에 찬란한 일출과 아름다운 석양을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 고통스러운 삶이 없다면 죽음뿐이다.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은 어떻게 기쁨일 수 있을까? 그것은 슬픔일까? 아니다. 견딜 수 없는 극한 고통이 이어질 때, 비로소 인간은 가장 근원적인 슬픔인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누빔점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누빔점이 있기에 정상인일 수 있다.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고통이 있기에 살아 있다. 고통은 우리 삶의 조건이다. 삶의 조건을 부정하지 말라. 그것을 부정하는 이가 도착하는 곳은 기쁨과 슬픔도 없는 텅 빈 암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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