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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

'찰나'가 '신(영원)'이고, 그것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선생님은 꿈이 뭐예요?” 20대의 푸릇푸릇한 아이들이 질문한 적이 있다. “죽음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갑분싸. 뭔가 희망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던 아이들은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단어 앞에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어쩌랴. 이미 오래 전에 '거짓의 평온'보다 ‘진실의 갑분싸’가 덜 불편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을. 죽음이 조금이라도 멀리 있을 때 죽음을 잘 준비해서 죽음이 들이닥쳤을 때 비굴해지고 싶지 않다. 그것이 정말 나의 꿈 중에 하나다.  

    

 한 해가 지나면 한 해만큼 죽음에 가까워진 셈이다. 사십대 중반에 이르니 이러한 삶의 진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철학을 한 뒤로 매일 조금씩 죽을 준비를 한다. 이는 염세주의적 혹은 허무주의적 냄새를 풍기는 말이 결코 아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기쁘고 유쾌한 삶을 추구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죽음을 잘 준비할 때,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체험되지 않는다. 영원이 무한한 시간 지속이 아니라 무시간성으로 이해된다면, 현재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시야에 한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 『논리-철학 논고』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의 짧은 책을 몇 번이나 읽었으면서 왜 이 구절을 놓쳤을까? 한 해만큼 죽음이 가까워졌기 때문일까? 우연히 다시 펼친 비트겐슈타인의 책에서 마치 매직아이처럼 이 글귀가 튀어 올랐다. 그렇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체험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우리와 상관이 없으며, 우리가 죽었을 때 죽음은 감각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진지하게 죽음을 준비하려 할 때 알게 된다. 죽음은 우리와 상관없다는 사실을.      


 죽음은 왜 두려운가? 그것은 우리가 영원을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한 것을 바라기 때문에 죽음, 즉 영원의 단절(끝)이 그리도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은 무엇인가? 무한한 시간인가? 바보 같은 소리다. 영원하다는 것은 무시간성을 의미할 뿐이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 밖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신神이 있다면 그것은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 무시간성의 존재다. 그렇다면 반대로 신이 없다면 무시간성의 존재는 없는 것인가? 



 무시간성의 존재는 있다. 바로 찰나의 현재다. 과거는 박제된 채로 영원하다. 미래는 실현되지 않은 채로 영원하다. 하지만 찰나의 현재는 다르다. 과거와 미래 사이를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는 찰나는 시간 밖(무시간성)에 있다. 즉, 영원이 무시간성이라면, 현재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셈이다. 이는 비유가 아니다.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온 몸으로 현재를 살았던 그 마음만이 영원하다. 이것이 고전이 영원에 가까운 이유일 테다.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한 인간이 온 몸으로 현재를 살았던 흔적이니까  말이다. 


 영원을 바라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방법이 있다. 영원히 살면 된다. 찰나(현재)라는 영원에 살면 된다. 지난 시간들이 달리 보인다. 한 사람을 마음에 담아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돌아보니, 그 시간들은 현재였고, 그 시간들만큼은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나는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았으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은 한 사람을 마음에 담는 일 이외에 없다. 그것이 고통이란 이름의 슬픔이든, 만족이란 이름의 기쁨이든, 그것만이 우리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는 구원해준다. 그 구원의 자리에 유쾌하고 기쁜 삶이 있다. 


 “현재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고통이든, 만족이든 한 사람을 마음에 담을 때 우리는 현재에서 영원히 산다. 그때만 죽음이 우리를 비껴간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시야에 한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 사랑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늘 한계 속에 산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은 안다. 고개만 돌리면 무한한 세계가 끝도 펼쳐지는 것처럼, 우리네 삶 역시 그렇게 끝이 없이 펼쳐져있다는 사실을. 죽음을 숙고한다는 것은, 사랑의 고통과 만족 모두를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지를 숙고하다는 말과 같다. 언젠가 내 꿈이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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