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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가?

돈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것이 인문주의의 답이다. 돈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면 사랑은 얼마나 가벼운 것이 되겠는가. 돈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면 가난한 이들은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인문주의의 길을 걸으며 나 역시 그렇게 믿으며 살았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옛 기억이 났다. 정말 돈이 없었던 대학시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는 데 안주머니에 작은 봉투가 만져졌다. “오빠, 돈 없어도 괜찮아.” 짧은 메모와 만 원짜리 30장이 들어 있었다. 그게 뭐라고 울컥하며 눈물이 찔끔 났다.

     

 돈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가? 그렇다. 그것이 진정한 인문주의자의 답이다. 돈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는 경직된 인문주의자다. 경직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지 못하는 인문주의자. 사랑을 해본 적 있는가? 그녀는 그 ‘30만원’을 벌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그 ‘30만원’을 주는 것이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얼마나 고민했을까? 그 ‘30만원’을 몰래 호주머니에 넣으려고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그 사랑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눈물이 찔끔 났을 테지. 그녀의 사랑은 ‘30만원’으로 표현되었다. 이제 20년이 다되어 가는 일인데, 지금도 그날 아침에 느꼈던 봉투의 촉감을 타고 전해졌던 그 사랑의 먹먹함은 잊혀 지지 않는다. 그 사랑은 나의 마음 깊이 각인되어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 절절하게 표현되었다.


 사랑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을 뿐, 돈으로 사랑을 표현할 순 있다. 그녀의 ‘30만원’의 사랑은 누군가의 ‘3000만원’의 사랑보다 결코 작지 않다. 사랑은 그렇게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30만원’으로 분명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그 '30만원'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사랑은 그렇게 먹먹하게 전달되지 못했을 테다. 이것은 결코 천박한 자본의 논리가 아니다. 여실한 사랑의 논리다. 


 좋든 싫은, 옳든 그르든,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은 땀과 눈물이며 피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땀과 눈물, 그리고 피로서 돈을 벌어 본 사람으로서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돈을 준다는 건, 나의 땀과 눈물, 피를 나눠준다는 말이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일까.      

 

 ‘사랑’받았다. 그녀에게 받았던 ‘사랑’을 다시 받았다. 그녀에게 ‘사랑’을 받아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번에는 눈물을 찔끔거리는 낯부끄러운 일은 면할 수 있었으니까. 20여 년 전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길을 알고 있다. 20여 년전 그때의 나는 그녀가 내게 준 ‘사랑’을 그녀에게 조차 제대로 되돌려 주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지금은 너무 잘알고 있다. 


 다시 ‘사랑’받은 나는 그때의 나보다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 이번에는 받은 '사랑'은, 사랑을 준 이들에게 잘 되돌려주고 싶다. 나를 사랑해준 이들에게 기쁜 미소를 선물하고 싶다. 다시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더 나아가 '그녀' 너머에 있는 '그녀'들에게도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 그렇게 조금씩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 


 '당신'의 땀과 눈물, 그리고 피를 나눠주어서 고맙습니다. 그 고마움 잊지 않고 '당신'도, '당신' 너머에 있는 이들도 더 사랑해주려고 애를 쓰며 살겠습니다. 또 만납시다. 그때 더 큰 미소를 선물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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