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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사랑의 표현

홍대 거리를 지날 때가 있다. 젊은 남녀들은 사랑을 표현한다.  "사랑해"라고 속삭이며,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한다. 그 모습이 예뻐 보일 때가 있다.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지만 그것은 멀리서 보았을 때 만이다. 그 젊은 남녀들 가까이로 가 본적이 있다. 그들에게 ‘사랑’은 없고, ‘사랑의 표현’만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랑은 무엇인가? 고통이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얼마나 고통 받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사랑을 정의한다. "사랑해"라고 속삭이고,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는 젊은 남녀는 상대를 위해 기꺼이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상대에게 줄 선물을 사지만 자신이 고통 받지 않을 만큼의 선물일 뿐이다. 상대와 약속 장소로 나가지만 자신이 고통 받지 않을 만큼의 장소로 나갈 뿐이다. 그들은 고되게 일하면서 상대를 위해 선물을 사지 않는다. 녹초가 될 만큼 먼 약속 장소로 나서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을 표현할 뿐, 사랑하지 않는다.


     

 혹자들은 묻는다. 사랑의 표현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사랑해"라고 속삭이고, 손잡고, 포옹하고, 키스하면 더 사랑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삶의 진실을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일 뿐이다. 사랑의 표현으로 커지는 것은 소유욕뿐이다. 사랑의 표현으로 사랑을 키우지는 못한다. 사랑은 오직 고통으로만 커질 뿐이다. 상대를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당하는 만큼이 사랑의 크기다. 철없던 시절, '사랑'과 '사랑의 표현'을 구분하지 못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사랑’ 없는 ‘사랑의 표현’은 사랑의 기만이다. 고통 없는 사랑의 표현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어떤 고통도 짊어지려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는 걸. 하지만 적어도 '나'는 기만적이고 부끄러운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사랑하고 싶지 않다. ‘너’를 위해 당장 더 고통스러울 수 없다면 사랑의 표현을 덜 하고 싶다. 언젠가 ‘너’를 위해 더 고통스러울 수 있을 때 더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 고통스러운만큼만 "사랑해"라고 속삭이고,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키스하고 싶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덜 기만적이고 덜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 싶다.

     

 ‘나’의 '사랑'이 기만적이지 않기를. ‘나’의 '사랑의 표현'이 부끄럽지 않기를. 며칠을 아팠던 '너'의 손을 잡고, 안아주고, 키스를 해주었던 일이 부끄럽지 않기를. 언젠가는 '너'를 향한 사랑을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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