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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공동체의 원인, 피해의식 III

슬픔의 공동체의 원인, 피해의식


 피해의식은 심각한 문제다. 피해의식은 슬픔의 공동체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권력자는 갖가지 의도적(사회적) 상처를 통해 피해의식을 방치하고 조장, 강화한다. 이는 우리의 공동체를 슬픔에 빠뜨린다. 선생이 공부에 대한 피해의식을 방치하고 조장할 때 아이들의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는가? 두 말할 나위 없이 슬픔에 휩싸인 공동체가 된다.      


 공부를 못해서 물리적‧정서적 폭력에 노출된 아이는 그 자체로 슬픔(자기비하‧분노‧경멸)에 빠지게 된다. 그뿐인가? 그런 폭력에 노출된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게 된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고 기쁜 것이 아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이유 없이 누군가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서 슬프다.(억울함‧적개심) 그뿐인가? 자신 역시 언제 성적이 떨어져 선생에게 맞거나 비난 받게 될지 몰라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아이들의 공동체는 잿빛으로 물든 슬픔의 공동체가 된다.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정부와 자본가가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을 방치하고 조장, 강화할 때 우리의 공동체는 어떻게 되겠는가? 두 말할 것도 없이 슬픔의 공동체가 된다. 가난한 이들은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며 돈을 버느라 슬픔에 빠진다. 주변의 동료들 모두가 경쟁자로 여기느라 슬픔에 빠진다. 동시에 부유한 이들을 시기‧질투하느라 슬픔에 빠진다. 부유한 이들이라고 기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의 근거 없는 시기‧질투의 대상이 되어서 슬픔(분노‧적개심)에 빠진다. 그뿐인가? 자신 역시 언제 가난해질지 모른다는 걱정과 불안에 슬픔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취업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이들이 불쾌함과 불만과 분노가 향해할 대상은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이 아니다. 취준생들끼리 혹은 노동자들 끼리 경쟁하고 질시하게 만든 이는 이주 노동자도, 동료 취준생도, 함께 일하는 노동자도 아니다. 탐욕스러운 자본가와 그 탐욕을 방치하고 부추기는 정부다. 피해의식에 빠져 있을 때,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권력자가 던져주는 그럴듯한 먹이를 물어뜯기에 바쁘다. “요즘 적게 받고 일할 사람들 많아” “네가 더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말들에 이주 노동자와 동료 취준생, 동료 노동자들 사이에 연대의식은 사라지고 서로 시기‧질투하느라 상호파괴적인 공동체가 된다.      


 피해의식은 거대한 감옥이다. 우리들의 공동체를 슬픔의 공동체로 몰아가는 거대한 감옥.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일은 두 가지 차원에서 고민해보아야 한다.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개인적 상처에 의한 피해의식이 ‘나’와 ‘너’를 슬픔으로 몰아간다면, 사회적 상처에 의한 피해의식은 ‘우리’를 슬픔으로 몰아간다. 개인적 차원의 피해의식을 성찰하며 치유하려고 애를 써야하는 만큼, 사회적 차원의 피해의식 역시 성찰하며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피해의식이라는 거대한 감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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