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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과 피해의식 II

피해의식 : ‘같이 죽는’ 방식의 자기방어다.

피해의식, ‘같이 죽는’ 방식의 자기방어다.


 피해의식은 자기방어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기방어의 마음이 과도해져서 ‘같이 사는 방식’이 아닌 ‘혼자 사는 방식’ 혹은 ‘같이 죽는 방식’의 자기방어 변질되기 때문이다.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외모 때문에 상처 받았던 이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혼자 사는 방식’과 ‘같이 죽는 방식’이다.


 전자는 자신도(혹은 자신만)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방법이고, 후자는 모두 못생긴 외모를 갖게 만드는 방법이다. 사실 전자는 큰 문제가 아니다. 혼자라도 살려고 하면 피해의식이 점점 옅어지는 선순환 속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뚱뚱한 외모 때문에 상처받았던 이들이 다이어트를 해서 매력적인 외모를 갖게 되면 적어도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은 점점 옅어지게 되니까 말이다.     


 문제는 후자다. 모두 못생긴 외모를 갖게 만들려는 마음이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너’와 ‘우리’마저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은 매력적이 외모를 갖고 있는 이들을 과도하게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칼을 들고 찾아가 매력적인 이들의 얼굴에 칼자국이라도 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뒷담화라도 해서 그들을 못난 존재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이처럼, 피해의식의 바닥에는 같이 죽고 싶은 파괴적인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피해의식, 공동체를 파괴하는 마음

    

 이제 우리는 ‘갑질’의 작동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나의 ‘갑질’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의 무관심과 불친절에도 불구하고, 왜 점원들이 친절한 미소로 응대해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직장과 돈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이었다. 직장에서 돈을 벌기 위해 사장과 상사의 비위를 다 맞춰주며 살았다. 사장과 상사 앞에서 한 없이 위축되어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살았다. 직장생활을 하는 그 긴 시간동안 그 피해의식에 잠식당한 채로 살았다. 그 때문에 나는 뒤틀어진 자기방어의 마음에 휩쓸려 지냈다.

      

 다 같이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방식(다 같이 사는 방식)으로 나를 보호하지 못했다. 나 혼자라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방식(혼자 사는 방식)으로도 나를 보호하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다 같이 비굴하게 사는 방식(같이 죽는 방식)으로 나를 보호하려 했다. 그만큼이나 나의 피해의식은 심했다. 고백하자. “나도 직장과 돈 때문에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너 역시 나처럼 비굴한 인생을 만들어주겠어!” “나는 돈을 벌려고 거짓 미소와 아첨을 하며 비굴하게 사는 데, 너는 점원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당당하게 있는 거지.” 이것이 나의 ‘갑질’ 근성의 바닥에 있는 마음이었다.


      

가난과  군대라는 피해의식


 이는 비단의 나의 피해의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시대 가장 보편적인 피해의식인,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이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을 살펴보라. 그들은 가난 때문에 상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가난하게 살지 않을 방법을 찾지 않는다. ‘나’도 가난 때문에 상처받았으니 ‘너’도 ‘우리’도 모두 가난 때문에 상처 받아야 생각한다. 함께 최저 임금을 올릴 생각보다 ‘나’보다 더 월급을 많이 받는 이들에 대한 반감에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이 우리네 현실 아닌가?

      

 이런 피해의식의 양상은 얼마나 흔한가. 남자들의 흔한 피해의식이 있다. 군대에 대한 피해의식이다. 이 역시 마찬가지다. 군대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의 마음은 뒤틀어질 대로 뒤틀어져 있다. 그들은 군대 때문에 상처받았으면서도, 다 같이 군대로부터 상처받지 않을 방법을 결코 찾지 않는다. ‘나’도 군대 때문에 상처 받았으니, ‘너’도 ‘우리’도 모두 군대에 가서 상처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같이 살자’는 것이 아니라 ‘같이 죽자’는 마음이다. 이것이 피해의식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논리다. 

     

 피해의식은 거대한 감옥이다. 나도 죽고, 너도 죽고, 우리도 죽어야 하는 감옥. 피해의식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피해의식은 함께 살길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는 길을 집요하게 찾는 파괴적인 마음이다. 이것이 피해의식을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으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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