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전에 내 귀를 뻥! 뚫어야 해...
집에서 영어 과외를 한지 두 달째다.
20번 가까이 수업을 했고, 그 사이 학교 졸업 후 은퇴했던 영어 세포들이 뇌의 부름을 받고 속속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다.
"나 이제 영어 좀 다시 해보려고 해! 다시 뭉쳐보자!"
10년 이상 변방에 흩어져 살던 영어 세포들과의 첫 상봉은 처참했다. 고액 과외로 다졌던 나의 날 선 과거의 문법 실력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 둔탁한 중년이 되어 돌아왔고, 굿모닝팝스로 다져진 리스닝 센스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몰골은 볼품없고 무기는 녹슬어 있었다.
아 세월이여...
나름 영어를 꽤 했고 외국인을 만나도 재미있게 몇 마디 정도는 나눌 실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생각이 아니라 상상이었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해 온 허언 같은 거랄까..? '신화'처럼 아득~한 이야기였다.
세상에... "굿모닝"이라는 인사 한마디도 어찌나 한참을 삐걱거리다가 겨우 튀어나오던지 물 마시면 입에서 녹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영어 문장과 단어들이 다 낱개로 해체돼서 메롱 메롱 약 올리며 뇌 속에 무중력으로 떠 돌고만 있었다.
처음 얼마간은 마트에 가서 계산대 앞에 서는 것도 두렵고, 길에서 마주치는 친절한 외국인의 눈인사도 부담스러웠다.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가면 다른 아이 엄마들이 말 시킬까 봐 티 안 나게 구석에서 아이와 놀았다.
그러다 덜컥 느껴진 겁! 우리 아이까지 외톨이를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엄마는 용감하다.
결국 자식 앞에 쭈구리되는 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영어를 폭풍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를 +1 획득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든, 명분과 동기가 없으면 잘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진.중.한' 타입이라 (이것은 자기 포장^^) 이렇게 확실한 동기를 획득하고 나니 그제야 쉽게 달릴 수 있었다.
영어 못해 쪽팔린 게 대수냐?
우리 아이가 엄마의 부족함으로 놀이터 구석에서나 놀고, 엄마의 쭈구리 같은 아우라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데 위축되는 꼴을 볼 수는 없지.
또 곧 유치원도 갈 텐데 선생님이 영어로 쏼라 쏼라 하는 말을 잘 알아 들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수능' 이후 이별 했던 역전의 용사들을 다시 불러 모은 것이다.
여기까지가 "나는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한 줄을 주저리주저리 늘려본 것이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해보면
한 줄로는 "영어! 재밌다"이며, 이제 이 한 줄을 또 주저리주저리 늘려보겠다.
처음 영어 수업을 하기 전날, 얼굴도 안 본 선생님에게 밑밥을 깔았다.
"제가 영어를 초보 수준도 안되게 못해요.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의 작은 기대도 차단하고 싶어 문자를 보냈고 그에 대한 답은...
'읽씹'
역시 미국인 마인드. 소쿨....
그리고 첫 수업. 선생님은 내 수준을 확인하겠다며 간단히 영어로 대화를 해보자고 했다.
등에 흐르는 게 땀인가? 겨울인데 웬 땀이... 긴장한 티가 역력했는지 선생님이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라고 용기를 주셨다. 그 말은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았고 되려 더 긴장한 상태로 "마이 네임 이즈..."부터 조심스레 꺼냈다.
입으로는 떠듬떠듬 요즘 초딩 수준도 안 되는 영어를 내뱉고 (예를 들면, "아이 라이크 오렌지 컬러" "아이 해브 어 도우러" 등) 자존심은 한쪽에 찌그러져 울고 있었다. 이런 걸 현타라고 하나..?
하지만 첫 수업 이후 너무 마음이 편해졌다.
결국 사람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한다.
상상 속의 내 영어 실력과 현실의 내 영어 실력 사이에서 뭐가 진짠지 알지 못한 채 붕붕 떠서 살다가 이제야 머리통 딱 맞고 너는 여기야! 하며 내 자리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나 영어... 더럽게 못한다.
굉장히 낮지만 딱 내 위치에 두 발 딛고 서니까 확실히 마음은 편했다. 그리고 뭘 해야 할지도 보였다.
그리고 외국 사람들 앞에서도 '나 이 정도밖에 이해 못하니까 알아서들 알아 들으슈' 같은 배짱을 가지고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은 당장 입에서 나오기 어려우니까 쓰기 연습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뜬금없이 나타난 의외의 헬퍼 '아시아나 볼펜'! 두둥!
문방 사후 덕후라 펜, 종이류만 보이면 어디서든 주워오다 보니 100개 넘어가는 펜이 있다. 심심해서 딸아이와 브랜드, 타입 별로 정리를 했다. 내 돈 주고 안 산 이 볼펜 먼저 작살내자며 아시아나 볼펜만 골라서 종이에 찌익 그었는데 세상에~ 어찌나 잘 써지는지 절로 노트 필기를 하고 싶어 졌다.
그때부터 글씨 쓰는 재미로 영어를 영작하고, 배운 걸 복습하고 끄적이고 하다 보니 첫 번째 영작 "I cooked 미역국"이 "I have a episode about the ipad that I oreded from amazone" 뭐 이런 식으로 길어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자랑이다.
어제 선생님한테 그동안 많이 늘었다고 칭찬을 받은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이 긴 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내면 부끄럽기 때문에 조금 멋지게 마무리를 해보겠다.
두려움은 현실의 감정이 아니다. 상상의 감정이다.
현실 인지를 통해 직시만 제대로 하면 두려울 건 없다.
나는 내 영어 수준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막연히 영어가 두려웠다.
하지만 내 영어 수준이 개똥밭에 뒹굴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개똥밭에 두 발을 딛고 선 순간부터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실망이 다가온다. 실망은 잠시 머물지만 좋은 '동기'를 만나 내가 한발 한발 내딛을 수 있게 도움을 준다. 난 지금 긴 마라톤 중 1% 달렸을까?
갈길은 멀었지만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 너무 홀가분하다.
천천히 내 길을 꾸준히 갈 수 있을 것 같다.
살면서 새로 맞이하는 낯선 것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막상 그런 것들을 직면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저 멀~리서 바라볼 때 참 두렵다.
두렵다면 오히려 빨리 가서 만나보자!
그곳에는 '불 뿜는 무적의 괴물'이 아니라 그저 '깐깐한 노인' 한 명이 있을 수 있다.
그 노인에게 이런 얘기도 하고, 저런 얘기도 하고, 그저 자주 보며 정을 쌓다 보면 어느 날 장밋빛 미래로 가는 문 열쇠를 쥐어줄지도 모르겠다.
(자랑한 김에 하나 더 하자면 아이패드 프로 샀다~!! 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