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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차 Jan 17. 2021

하찮은 작은 리더라도 되어봤더니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면 먼저 자기를 다스려라.”

                           - 영국의 극작가 필립 메신저 -



당신은 자신의 삶의 지휘관으로서 자신을 잘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과거의 나’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나’가 더 마음에 드는가? 일상에서 자신의 내적인 성장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가? 잘 모르겠다면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너 사람 됐다’ 라거나 ‘좀 멋져졌다’라고 간혹 칭찬을 듣는가?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자신만의 달팽이집에서 나와 그동안 자신의 마음을 단련하며 쌓은 내공을 시험해 볼 때다.

      

사실 마음의 가장 중요한 내적인 역량이라 할 수 있는 평온함과 자존감은 혼자 있을 때는 흔들리거나 훼손될 일이 별로 없다. 언뜻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다. 누군가 와서 건드리지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마음의 닻을 얼마나 견고하게 내렸는지는 갈등 상황에서 특히 내 취약성이 노출될 때 확실히 증명이 된다. 그로 인해 내 진짜 마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고 한편으로 마음 수련의 고삐를 다시 조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렇다면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일을 주관하면서 새로운 상황에 부딪혀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바로 작은 모임이든 조직 내 작은 분야에서든 리더의 경험을 해보는 것이다.   

  

나는 작년에 내면적으로나 업무적으로도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했을 때 부장 제의를 받아 나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아 보았다. ‘NO'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관리자가 나에게 보내는 ‘신뢰’와 내면의 나가 나에게 보내는 ‘자신감’이라는 시그널이 만난 지금이 도전과 성장을 할 수 있는 딱 알맞은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변화한 내가 궁금했다. 내가 더 많아질 업무와 책임감, 관계에서의 스트레스를 얼마나 잘 극복해갈지, 사람들을 따뜻하게 포용하면서 어떻게 협력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낼지, 돌발 상황들 속에서 괴물로 변하지 않고 나 자신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지. 그렇게 나는 익숙하고 안락한 나만의 공간에서 조금은 낯설고 불편한 광야로 나왔다. ‘나 자신’이라는 보호막을 믿고.      

  


     

| 하찮아질 용기가 필요해 |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잘해 보려는 열의와 에너지로 힘든 줄도 몰랐다. 업무에서도 나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에 부장 역할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끝없는 ‘새 틀 짜기’와 ‘새로 고침’, ‘끊임없는 회의’와 ‘최선의 선택’, 새로운 디지털 기술의 습득에 대한 ‘도전’과 ‘인내’ 그리고 ‘내 안의 나’와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 거의 매일 이 여덟 가지의 핵심 업무가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예전 같으면 기존의 양식을 살짝 수정만 하면 되었다. 회의는 일주일에 한 번이면 되었고 선택할 거리는 사소하고 단순했다. 협업할 일도 많지 않았기에 갈등이 발생할 일은 드물었다. 그냥 각자가 자기 할 일만 잘하면 되었다.  

   

 그런데 코로나 상황에서는 협의하고 조율하고 협력해야만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즉 그 일들을 주관할 중간 관리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각자도생을 했다가는 어쩔 수 없이 비교와 경쟁을 하는 차가운 분위기가 조성될 게 불 보듯 뻔했다. 신구의 격차, 디지털 활용 능력의 격차, 심지어 사고방식의 격차로. 방향뿐만 아니라 속도까지도 맞춰나가야 하는 연대의 순간들이었다. 나는 우리 1학년이라는 작은 배의 선장이 된 듯했다.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키를 단단히 잡고 모두에게 안전한 길을 보여주어야 하는 길잡이. 솔직히 버거웠다.  

   

그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나의 불완전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마음공부를 하면서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고 생각한 완벽주의와 인정 욕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내 안으로 향해 있던 시선이 다시 타인을 향하고 있었다. 약해진 나를 느꼈다. 조그마한 실수를 해도 부족한 사람이라는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나를, 부장으로서 자격미달이라는 자기비판을 하고 있는 나를, 관리자에게든 동료들에게든 잘하고 있다는 인정을 갈구하는 나를. 매일 타인으로부터 평가받는 기분이었다. 반 아이들에게 항상 ‘최고’보다는 ‘최선’을, ‘완벽’보다는 ‘탁월함’의 미덕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내가 딱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영국의 소설가 D. H. 로렌스는 하찮아져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기꺼이 닦이고 지워지고, 받아들여지지 않고 하찮아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결코 정말로 변하지는 못할 것이다.”


  변하고 싶었다. 정말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냈던 게 아닌가. 하찮아지기를 선택했다. “오류 부분이 있는지 확인 부탁드려요.”, “여기 편집이 잘 안 되네.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줄래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회의 도중 문서를 만들어야 할 때가 많았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실력을 보여주고 기술적인 면에서 나보다 더 나은 젊은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버벅거리고 얼굴까지 빨개졌다. 그렇지만 더 완성도 있는 공문을 내보내야 한다는 목적에만 집중하며 나라는 개인을 지웠다. 간혹 부장이라고 하더라도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공격을 받을 때는 아집이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마음의 평정심을 되찾으며 내 경험치의 부족과 문제를 큰 틀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좁은 식견을 가진 나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리고 내가 옳다는 자만심을 자각하며 최선의 결정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이렇게 조금씩 나의 취약함을 노출하고 도움을 요청하면서 오히려 자신감이 더 회복되는 걸 느꼈다. 「인생을 바꾸는 90초」에서 조엔 I. 로젠버그는 스스로 취약해지고자 할 때 가장 큰 감정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며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자신의 욕구와 한계를 경험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감정적으로 강인한 모습이자 인간 경험의 일부분이다. 도움을 청하는 것은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인간성의 표시다.” 참 힘이 되는 말이지 않은가. 취약함을 메우기 위해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이 인간적인 매력이 될 수 있다니. 더 이상 자존심 상해할 이유가 없었다. 



이때 하찮아질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준 부캐가 있다. 퇴근 후 집안일을 끝내면 곧바로 달려드는 ‘글 쓰는 사람’이다. 성과가 바로 나오고 만만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건축물을 짓듯 차곡차곡 문장을 쌓아 올리는 작업은 내 일의 만족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쓴 오타 하지메는 여러 개의 스테이지에서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갖고 사는 것도 강박을 낮추는 효과가 있느냐는 조선비즈 김지수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능력을 발휘하는 장소, 평가받는 그룹이 많을수록 평가에 덜 심각해집니다. 한 군데서 인정받으려고 올인하지 않죠. 정체성을 분산시켜 다원화하면 ‘이게 아니면 다음’이라는 대안이 생겨요. 반드시 본업 이외에 부업이나 취미를 갖기를 권합니다.” 정말 그랬다. 직장에서 인정 욕구가 극에 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매진하는 분야가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거기에서 나다움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부캐 덕분에 나는 훨씬 편안해지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최선을 다한 공문에서 실수가 발견되었을 때나 부장회의에서 존재감이 없을 때도 수치심까지 느끼지는 않게 되었다. 불쾌한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경미한 실수는 있었지만 나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해서 일을 마무리했잖아.’, ‘집에 가면 나를 가장 나답게 해주는 또 다른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좀 하찮아지면 어때. 괜찮아. 나만의 또 다른 강점이 있으니까.’ 얼핏 그럴듯한 변명 같아 보이지만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물론 인정 욕구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고 하찮아질 용기를 선택하면 된다. 신기하게도 취약성에 편안해질수록 반대급부로 강점에서 더 자신감을 발휘하게 된다. 그게 바로 하찮아짐의 마법이다.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오만 감정들이 내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하마터면 회의 분위기를 껄끄럽게 만들어서 하찮아짐의 마법을 부릴 기회조차 잃을 수 있었다. 이때 불편한 감정과 표정의 노출로부터 나를 보호해준 마스크에게 감사하다. 보이지 않게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다스리고 침착하게 숙고하며 결국 하찮아짐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게 해 주었으니까.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존재하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그렇다. 코로나 시대에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마스크가 존재하며 덕분에 더 나은 반응을 선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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