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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차 Jan 25. 2021

귀찮음을 극진히 모셔봤더니


‖극진히 모시자. 귀찮음을 선물해 주었으니‖   


“아이가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때에는, 아마도 이미 성인이 되어 당신을 떠났을 것이다! … 친구가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때에는, 아마도 이미 당신과 멀어졌을 것이다! 인생은 서로를 귀찮게 하는 과정이다. … 귀찮음이 오고 가는 사이에서 정이 싹트고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 인생은 바로 이러하다.”    

  

중국의 베테랑 편집인인 마오뎌슝의 「귀찮으면 지는 거야」의 서문 중 일부다. 업무에 치이고 이런저런 일들로 힘들어할 때 이 글귀를 만났다. 귀찮음의 반전 철학이라고 해야 할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귀찮음이 덜 귀찮게 보였다. 아니 조금 과장해서 지금 누릴 수 있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편견은 깨져야 제 맛! 이후에 맛보는 깨달음은 꿀맛이다.


안타깝게도 차츰 부장으로서 적응할 무렵 나만 손해를 본다는 억울함이 들기 시작했다. 봉사직과 다름없는 부장일 뿐인데 예기치 않은 일들이 모두 내 몫이 되었다. 특히 동료가 해온 결과물의 완성도가 낮거나 실수가 많은 경우 사후처리까지 해야 하니 스트레스는 계속 쌓여갔다.    

  

  ‘이것이 최선입니까?’ 자꾸 오래된 드라마 <시크릿 가든> 속 현빈의 대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귀한 시간을 빼앗기며 귀찮은 일들을 또 할 생각을 하니 화가 났던 것이다. 한편으로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내가 하찮아지기로 했던 건 나의 취약성과 한계를 인정해서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동료의 사소한 흠집 앞에서 왜 눈을 감지 못하냐 말이다. 기시미 이치로의 「버텨내는 용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타자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는지가 아니라 내가 타자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관심을 가집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입으로 들어오는 바이러스는 마스크로 선제적 방어를 잘하고 있었지만 정신에 파고드는 바이러스에는 능동적 방역을 하지 않았음을.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 지금 번아웃되어가고 있어. 지쳤다고.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 기준이 높은 거 알지? 모두 자기 선에서는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조금만 관대해지자. 너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내면의 나가 들려주는 말은 항상 옳다. 현재의 내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해주고 처방까지 해주니까. 마음이 산뜻해지면 몸도 가벼워진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할 혜안이 생긴다. 우선 귀찮음을 연상케 하는 ‘왜 나를 힘들게 하지?’라는 질문을 지워야 한다. 대신 그 자리에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띄우는 거다. ‘나를’에서 ‘내가’로의 변환. 문제 해결의 열쇠를 내가 쥐자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탤 게 나를 조금 인정해주는 것이다.    

 

최명화 대표가 조직에서 여성 직장인이 현명하게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쓴 책  「PLAN Z」에 자기 인정에 관한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내가 아무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도와줄 수 없다. 도와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내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다.” 

이번에도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은가. 귀찮음을 해결하는 일이 내 영향력을 나눠주는 거라니. 비록 변변치 않지만 내가 가진 재능에 감사함이 느껴졌다.    



 

며칠 뒤 또다시 귀찮은 일들을 만났다. 하지만 이번 대응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귀찮음 1단계, 거의 매주 1~2회 정도 오는 14년 지기 절친의 SOS에 답하기. 부탁한 자료 보내기 성공! 재능기부 미션 클리어! 귀찮음 2단계, 수업활동을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포기하거나 아예 참여를 거부하는 우리 반 남자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기다리기, 그리고 하교 시간 이후에 따로 집까지 바래다주기.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따라오나 싶었다. 그런데 아이는 종이접기를 하다 말고 멈춘 뒤 계속 씩씩거리는 거다. 말을 하진 않지만 이유는 분명히 있다. 기다려야 한다. 넘치는 인내심을 갖고. 남아서 완성하고 가겠냐는 질문에 고개만 끄덕인다. 그래도 책임감은 있는 아이다. 이후 모두가 하교 준비를 하느라 수선스런 틈을 타 우리 반에서 제일 손재주가 좋은 여자아이가 가만히 다가왔다. 그리고 내게만 들릴 듯 조근조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할 말이 있어서요. 사실 진우가 아까 접은 모자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봤어요. 뭔가 잘못 접었나 봐요.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선생님 속상하실 수도 있고 그 친구도 부끄러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지금 말씀드리는 거예요. 제가 남아서 도와주고 가면 안 될까요?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요.”  

  

순간 8살밖에 안 된 아이가 얼마나 크게 느껴지던지. 부끄러웠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모두가 마음 상하지 않는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냈을까. 시간적 손해를 감수하고 자신의 재능을 어찌 저렇게 자발적으로 나누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의 가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공헌감을 통해 얻어진다는 아들러의 철학을 어찌 알고 있었을까.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 맞다.   

  


‘고마워’라는 말이 여러 번 오갔다. 이보다 더 훈훈한 방과 후 종이접기 시간이 또 있을까.  여자 아이는 언니를 따라 먼저 집으로 갔다. 고양이처럼 특유의 경계심을 갖고 있고 주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 예민한 관찰자와 의도치 않게 집사가 된 나는 손을 잡고 걸었다. 아이의 집까지 200미터 정도를 걸으며 꽤 재미난 대화가 오갔다. 


“우리 진우랑 데이트하니까 참 좋다.”

“데이트가 뭐예요? 저는 게임할 때 쓰는 업데이트라는 말밖에 모르는데.”

한참을 웃다가 내가 이렇게 말했다. “데이트는 좋은 사람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걸  말한단다.” 그랬더니 아이는 도도하게 이렇게 말하는 거다. “그럼 이거 데이트 맞네요. 엄마랑도 데이트하는 거였구나.” 

나는 또 웃었다. 이 귀여운 고양이는 나와 헤어지고 정확히 다섯 번이나 무심히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미션 클리어! 덤으로 잊지 못할 순간을 포착하는 일까지 성공!    


마지막 귀찮음 3단계, 동료가 보내온 학습지 수정하기.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동료에게 고맙다.’는 생각으로 귀찮음과 마주했다. 천천히 문장을 손보고 자연스럽게 편집 성공! 최종 미션 클리어! 




귀찮음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니 내 마음속에 세 가지 선물이 쌓였다. 결코 얻기 쉽지 않은 고양이 과 아이의 마음, “너는 널리 학교생활을 이롭게 해주는 홍익인간이야”라고 말하며 친구가 붙여준 ‘홍익인간’이라는 과분한 별명, 그리고 “고마워요. 편집하느라 수고 많았네요.”라는 무뚝뚝한 동료의 따뜻한 말 한마디.     

  

살아있는 한 귀찮음에 대한 불평과 감사는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허나 인생 자체가 서로를 귀찮게 하는 과정이라고 하지 않은가. 나의 존재 가치 또한 그 귀찮음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고. 조직에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양쪽이 모두 이득을 취하는 상리공생 관계다. 이러한 관계 형성은 귀찮음을 대하는 내 태도에 달려있다. 그러니 우리를 귀찮게 하는 존재를 만나면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속으로 이렇게 되뇌자.

“극진히 모시자. 귀찮음을 선물해 주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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