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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차 Jul 03. 2022

안나

<#일상에서 건져 올린 시처럼 생긴 것들>


당신이 흰 종이라면

작은 점 하나 찍혀있지 않은 순백의 종이라면  

   

당신을 향한 내 마음속 단어들을 탈탈 털어내어

가장 진실에 가까운 표현들을 당신의 몸 위에 새기고

아무렇게나 그 종이를 구겨 내 안에 넣어 버리고 싶다    

 

나만 알고 있는 종이

나만 알고 있는 시

오로지 나만 아는 그 서사     


비난이든 비평이든 비열한 하이에나는

보이지 않는 것은 절대 물어뜯을 수 없을 테니   

  

당신의 몸 위에 쓰여진 나의 시는

그 누구도 읽을 수도 지울 수도 없다    

 

그것은 나의 살점으로 쓰여졌고

시린 눈물방울들로 덧씌워졌고

시꺼먼 절망과 증오의 바퀴 자국으로 얼룩져 있으니

     

적어도 움직이는 기차는 멈춰버린 나보다 낫다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우리보다 낫다

    

결코 후회되지 않는 그러나 지속시킬 수 없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슬픔이 몰려온 어느 날

나는 나를 지운다

당신을 절대 지울 수 없으니

    

당신은 나의 것이 될 수 없지만

영영 될 수 없겠지만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   

  

당신은 나의 시의 것이다   


        

*<안나 까레니나> 영화를 본 뒤 석영중 교수의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 유튜브 강의를 듣고 안나를 생각하며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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