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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차 Aug 11. 2022

명상적 편지 쓰기로 마음을 클렌징하고 핵인싸로 거듭나기

<#엄마의 가성비 좋은 셀프 치유 놀이>

    이 나이에 학창 시절 이후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일기를 강제적으로 써야 할 일이 있었다. 2년 전 책 쓰기 모임에서 출간 일기라는 명목으로 사부가 내준 과제였다. 완벽주의 성향에 귀차니즘에다 ‘꾸물리즘’까지 있는 나로서는 매일 써야 하는 일기만큼 부담 백배인 숙제도 없다. 게다가 여러 사람들이 보는 블로그에 올려야 하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작가(나)는 오로지 자신을 노출시킴으로써 존재하는 부류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을 소모하고 스스로를 걸고 도박을 한다는 뜻이다.” 미국 최고의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 소설가인 수잔 손택의 『다시 태어나다』에서 그녀가 스물여섯 살 때 쓴 일기의 일부다. 나는 작가도 아니고 이제 막 책이라는 걸 써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평범한 40대 아줌마인데도 딱 저 심정이었다. 노출과 도박! 빈약한 내 ‘글알몸’을 과연 내보일 수 있을까? 누가 쳐다봐 주기나 할까? 망신만 당하고 자존심 상해 다시는 글을 쓰고 싶지 않으면 어쩌지? 별별 생각에 불안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문득 처음 참여해본 글쓰기 모임에서 내 글을 보고 22살의 당찬 여대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생님 글에서 장영희 교수님 냄새가 나요, 뭔가 장애를 딛고 일어서 자신이 극복한 지혜를 나누어 주고 싶어 하는……” 어찌 간파했을까? 내가 장영희 교수님만큼은 안 되지만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걸. 그래서 결심했다. 일기 대신 편지를 쓰자고. 장영희 교수님께 마음으로 부치는 편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 본 적이 있다면 알 거다. 써 내려가는 내내 그 사람이 떠올라서 설레고, 시공간이 다른 곳에 있지만 왠지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들어서 덜 외롭고, 편지를 다 쓰고 나면 그 사람이 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행복해할지 상상이 되어 뿌듯하고.   

  

  그래서 시도한 편지식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교수님, 제가 교수님이 지으신 책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계시나요? ……. 사실 선생님을 꼭 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신체적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보란 듯이 극복하고 영혼이 힘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쓸모 있게 펼치시는 모습에 반했거든요. ……. 선생님, 거기에서도 여전히 문학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주변 사람들을 축복하며 지내시겠죠? 그리 고급지고 다채로운 것만 드시다가 간혹 김치랑 계란 프라이에 간장이랑 참기름만 넣고 비빈 평범한 비빔밥이 생각나지는 않으신가요? 그러실 것 같아서 제가 선생님의 늦깎이 제자를 자청하며 저의 소소한 얘기들을 들려드리려고 해요. 달팽이 과여서 느리기도 하고 간혹 숨을 수도 있지만 멈추지 않고 등에 진 작은 집에서 이야기를 꺼내어 드릴게요.…….”     


  마흔넷 편의 편지를 쓰면서 글을 쓴다는 느낌보다 수다를 떤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떤 말을 해도 수용해줄 것 같은 넓고 따뜻한 어른 사람 앞에서, 물론 나 혼자 말하고 묻고 답하는 일방적인 대화였지만 오히려 상황이나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괜찮은 해결책도 내놓을 수 있었다. 그 이유가 뭐였을까. 치유하는 글쓰기 연구소 박미라 대표의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에서 그 답을 찾았다. “생각과 감정을 글로 옮기게 되면 생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다음 단계로 생각이 발전하는 것이다. ‘자, 그래서 내 고민의 핵심이 뭐지? 근본적인 문제가 뭐지?’ 그걸 찾아내고 나면 아마도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라고 묻는 단계가 올 것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이 나이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사람은 ‘현재의 나’다. ‘과거의 나’를 한 발치 떨어져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날 낮에 겪은 에피소드가 부정적이었고 다분히 감정적이었다고 해도 결론은 이성적이고 담담하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거다. 자신을 비련의 주인공으로 억울해하며 자포자기 상태로 둘 것인지, 들장미 소녀 캔디나 빨강머리 앤처럼 극복과 긍정의 아이콘으로 변모시킬지. 그 최종 선택은 본인이 하는 거다. 오늘의 드라마 작가는 나니까.   

    

  이렇게 온전히 편지 쓰기에 푹 빠져 있다 보면 간혹 몇 시간이 지난 지 모를 때도 있었다. A4 4장에 빼곡히 쓰인 고민과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꽤나 합리적인 해결책까지. 길고 긴 고해성사를 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너무 심각하지 않은. 적당히 통통 튀면서 담백한. 마음이 씻겨져서일까. 두세 시간밖에 잠을 못 자도 하나도 피곤한지 몰랐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무엇보다 내 이런 솔직한 ‘글알몸’을 블로그에 올릴수록 덜 부끄러워졌다. 글을 쓰면서 마음이 정화될 때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지나친 완벽주의와 과도한 인정 욕구, 두려움 등이 서서히 씻겨나간 것이다. ‘좋아요’와 댓글 개수에 일희일비하던 마음도 댓글 없이 ‘좋아요’만 두 개 있어도 감사했다. ‘세상에나 바쁜 시간을 내서 내 모자란 글을 읽어주시다니’ 더불어 이상적인 나를 내려놓고 현실의 나를 인정하고 칭찬해주었다. ‘쓰레기 한 봉지 같은 글이라도 어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써서 올렸잖아. 잘했어!’   

  


  이렇게 명상적 편지 쓰기의 맛을 보고 나니 실제 소통할 수 있는 대상에게 편지를 써 볼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썼다. 매주 금요일, 1학년 전체 학부모님들께. 코로나 시대라는 특수 상황에서 아이들을 입학시켜 놓고 학교에 방문 자체가 막힌 채 불안과 걱정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부모님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자 하는 취지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에서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편지에는 작은 성찰과 알아차림, 깨달음 등의 명상적 요소를 가미하게 되었다. 전혀 의도하거나 계획한 건 아니었다.  

    

  분명 시작은 내가 한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글을 끌고 가는 것 같았다. 깊게 몰입이 되면 나가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고 하지 않나. 바로 그거였다. 특히 과거에 내가 딸아이에게 엄마로서 한 실수를 깊이 반성하며 우리 1학년 학부모님들은 같은 길을 걷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쓸 때는 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주책없이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쉼 없이 타이핑을 했으니까. 글을 쓰고 있는 참나(내면의 나)가 과거의 엄마인 나를 용서하고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현재의 엄마인 나와 화해시키는 느낌. 또한 나처럼 자녀에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죄의식과 수치심에 괴로워하고 있는 엄마들까지 불러와 끌어안아 주는 듯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영화 속 한 장면>

  모두가 퇴근한 시간 홀로 교실에 남아 사방이 어두컴컴해지는 줄도 모르고 편지를 쓰는 데 전혀 외롭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더 큰 나와 상처를 지닌 나, 현재의 나, 나와 같은 또 다른 나들과 함께 교감을 하며 창조적 고독을 즐겼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2년간 이어진 행복 편지라는 이름의 명상적 편지 쓰기로 나는 오랫동안 나 자신에게 붙여놓은 ‘나쁜 엄마’라는 꼬리표를 떼냈다. 단순히 학부모님들을 위해 편지를 썼을 뿐인데 내 내면 깊이 남아있던 묵은 감정 찌꺼기를 배설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다. 과거 아픈 엄마였던 나와의 아름다운 이별! 그때의 심정은 2021년 12월 31일의 마지막 편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일부다.  

    

  “이 아이들을 통해 또 한 번 부모로서 교사로서 가야 할 방향을 봅니다. 속도로 섣부르게 사람을 재단하지 않기를. 억지로 끌고 가지 않고 아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기를. 답답해하기보다 아이가 준비될 수 있게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를. 좀 버거운 일 앞에서는 야단치기보다 손을 잡아주기를. 힘들어하면 쉬었다가 가게 해 줄 여유를 갖기를. 어쩌면 이 말들은 내 부모가 혹은 내 주변 어른들이 우리에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아니었던가요?” ……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제 본성을 거스르며 무작정 달리다가 번아웃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었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더 잘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세심하지 못한 나를, 느린 나를, 불안정한 나를 인정하고 어루만지는 게 우선이었던 거예요. 내가 나를 용서하고 예뻐해야 마음속에 소란이, 갈증이 가라앉는 거였더라고요. 그래야 마음이 평온해지고 자연스럽게 애쓰지 않고도 육아든 일이든 할 수 있더라고요. 부모 마음이 편안하고, 작고 보잘것없는 용기라도 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힘이 생기면 그때부터 마음에 여유가 생기죠.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고요. 비난의 말들은 온기로 감싸 지고 삶에 활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부모의 그 좋은 기운을 받아 생기 있고 용기 있게 학교생활을 해나가는 거죠.” ……     

  

  “이렇게 변변치 않은 글을 올리게 된 나름의 이유는 있었답니다. …… 또 다른 개인적인 이유는 결핍에 대한 보상 같은 게 있었습니다. 그 시절 미숙한 부모여서 제 아이에게 잘못 주었던 사랑을 이제 조금 뭔가 알게 된 제가 우리 1학년 아이들과 부모님들에게 주고 싶었던 겁니다. 혹시 저와 같은 부모님이 한 분이라도 계신다면 위로와 응원을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다 괜찮다고, 실수할 수 있다고, 이제부터라도 아이를 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보라고,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주라고 어떤 경우에서든.”

     

  “1년 동안 어쩌면 소음이 되었을 편지를 누군가의 부탁이 없었음에도 제멋대로 올려서 참 죄송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분 하나 그만 쓰라고, 듣기 싫다며 비난하는 말씀은 해 주시지 않아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리 너무 좋은 부모가 되려고 애쓰지 마요. 대신 좋은 사람은 되려고 해 봐요.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좋은 사람 말이에요. 그게 부모와 아이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육아의 해답이지 않을까요?”

     

   답은 내 안에 있었다. 꺼이꺼이 울면서 토해내듯 썼던 것 같다. 그리고 찾아온 알 수 없는 개운함과 평온함. 몇 군데 오타나 띄어쓰기의 오류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자기 검열로 나를 쪼그라뜨리기에는 나는 마구 구겨도 구김이 가지 않는, 툴툴 털면 금세 펴지는, 꾸안꾸 룩의 대명사, 링클프리 흰 면티가 되었으니까.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빅토리아 베컴'>

    요즘은 더 간편하게 입으로 명상적 편지 쓰기를 하기도 한다. 주로 대상은 직장에서 내게 성찰할 거리를 안겨주는 동료들이다. 설거지하면서, 집안 청소를 하면서, 거울을 보고 나이트 케어를 하면서 등. 아무 때나 어디에서든 할 수 있어 좋다. 최대한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내 감정과 고쳐줬으면 하는 점 등을 말하고 나면 보인다. 상대가 틀렸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 상대를 제멋대로 통제하려는 그 녀석, 에고의 출몰이. ‘그래,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그럴 수도 있지!’ 다시 알아차림과 호흡으로 에고를 수면 마취시킨다. 지긋지긋한 녀석, 불멸의 악동을.

    

  얼마 전 회식 자리에서 한 젊은 동료 교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선생님, 우리 학교 인싸잖아요.”

  “내가 왜? 난 자발적 아웃사이더인데.”

  “에이 뭔 소리예요. 완전 핵인싸지. 교육과정의 문제점도 정확히 짚어내고 대안책도 확실하게 내주고요. 자기애도 강해 보이고 자존감도 높고.”

순간 속으로 놀랐다. ‘내가 그렇게 보인단 말인가’, ‘이 나이에 정말?’.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내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면서 지냈을 뿐인데. 동료들이 불편해하는 점들을 적극적으로 얘기하고 더 나은 업무환경을 만들고자 살짝 총대를 멨을 뿐인데. 내 안목과 아이디어를 믿으며 내가 만들고 선택한 자료들을 기꺼이 공유했을 뿐인데. 그냥 나답게 지냈을 뿐인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에서 안젤름 그륀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자신을 즉각 변화시킬 수 없다. 변화는 서서히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찾아온다.” 명상적 편지 쓰기를 하며 내 안을 서서히 비워냈더니 빈 공간에 ‘핵인싸 꽃’이 피었나 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아주 조금씩. 천천히. 내게 있어 명상적 편지 쓰기는 ‘우아하게 지적으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를 하며 내면의 찌꺼기를 클렌징하는 명랑한 은둔 작업이다. 이 얼마나 고급지고 즐거운 치유 놀이인가. 이 나이에 생각지도 못한 ‘핵인싸’라는 말도 들을 수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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