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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차 Aug 22. 2022

명상적 춤으로 뼛속까지 박힌 감정 찌꺼기 스케일링하기

<#엄마의 가성비 좋은 셀프 치유 놀이>

    “저 연습도 안 했고 도저히 부끄러워서 지금은 못 하겠어요. 마지막으로 할게요.”

작년에 지인의 소개로 최보결 선생님의 ‘방구석 랜선 힐링춤 1기’에 참여했었다. 코로나 시국이기에 줌을 활용해 컴퓨터 앞에서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힐링 수업이었다. 총 5회로 이루어진 수업이었는데 마지막 시간에는 자신이 직접 선택한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추는 것이었다. 맙소사!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의 주특기인 긴장과 불안이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사실 곡 선정도 안 했거니와 춤 연습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다른 분들의 춤을 보면서 나의 즉석 춤을 구상할 시간을 벌 요량이기도 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호흡명상으로 평상심을 찾고 말하기 명상으로 일어설 용기를 냈다. ‘은혜야, 쫄지마! 넌 할 수 있어! 까지껏 그냥 해 버려!’ 음악은 그 시기에 가장 내 감성을 자극했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싱어게인>에서 30호 가수였던 이승윤 버전으로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옷도 위아래 올블랙으로 갈아입었다. 손목에는 스카프, 배꼽이 보일 듯 말 듯한 타이트한 윗옷에 통바지까지. 이건 무슨 90년대 패션인가.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나는 춤 앞에서 잠시 20대로의 회춘 아니 회귀를 꿈꾸었던 것 같다.   

   

<춤추는 나>

  거의 3분 40초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 가수가 만들어낸 리듬에 몸을 맡겼다고 하면 적합한 표현이 될까. 우선 눈을 감았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겠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내 안에 집중하겠다는 뜻이 더 강했다. 알 수 없는 손놀림, 고갯짓, 어깨와 몸의 꺾임, 터닝, 헤드뱅잉, 제멋대로 이리저리 왔다갔다 살금살금 총총대는 두 발의 움직임, 온몸에 날개가 돋친 듯 가볍게 날아올라 두 다리를 모두 뻗은 점프 등. 나는 홀로 대지에서 춤인 듯 춤이 아닌 다양한 움직임들이 짬뽕이 된 정체불명의 춤을 추는 댄서가 돼 있었다. 

     

  “아래층에서 올라오겠다. 음악 꺼라. 혼자 뭔 난리야?”며 남편의 야유에도 멈추지 않았다. ‘말릴 테면 말려 봐라. 나는 끝까지 내 길을 간다. 완성해 내고야 만다.’, ‘나는 더 이상 쫄지 않는다. 누를 테면 눌러봐라.’ 잠깐의 뚝심을 발휘한 뒤 곧바로 내 안으로 더 깊숙이 몰입했다. 그렇게 나는 그 ‘무엇’이 되어 3분 40초 동안 표현할 수 있는 온전한 나를 드러냈다. 최보결 선생님이 『나의 눈물에 춤을 바칩니다』에서 언급하신 “자신의 본성을 감추고 긴장하며 즐거움을 보류하고 본성을 감추고, 상처도 감추고, ‘감추는 것에 익숙한 몸’이 아니라 ‘드러내는, 표현하는 몸’을 체험하게 하고 싶다.”라는 춤을 통해 실현시키고자 하는 그 목적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20대 아이돌 같았어요. 무슨 공연을 본 느낌이에요.”

  “세상에나 그 엄청난 끼를 어찌 숨기고 살았을까요.”

  “넋을 잃고 봤네요. 정말 멋졌어요.”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춤은 내게 부끄러움의 최고 수위의 영역에 있는 것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몸이 나를 위로한다』에서 남희경 심리치료사님은 예술적 에너지원은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일어난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분노의 질주, 결핍의 상처, 상실의 결핍감, 쾌감을 잃어버린 권태, 뼛골까지 사무치는 고독감과 같은 부정적 감정이 불씨가 되어 예술의 창작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 힙합댄스, 하카댄스, 플라멩코, 살풀이와 같은 춤은 대표적으로 분노를 승화시킨 춤이다.” 그랬었구나. 아빠의 위력 앞에서 언제나 긴장하고 무력했던 어린 나의 분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분노로 변한 내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 암덩어리들, 결핍감, 외로움 등이 진동하는 몸을 통해 뼛속까지 전달되어 밖으로 끄집어내진 것이다. 힙합댄스 같기도 하고 살풀이 같기도 하게.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고 벌겋게 상기된 내 얼굴이 줌 화면에 고스란히 띄워졌다. 그런데 그 얼굴은 너무도 해맑고 생기 가득한 아이의 얼굴이 아닌가. 동안 시술을 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순간만은 분명 영해졌다. 아이다움은 본능이자 살아있는 감각이고 생명력이라고 한다. 그 아이다움이 되살아난 것이다. 

     

  춤을 추는 동안 줌 화면 속 관객들 외에 또 한 명의 관객이 있었다. 바로 딸아이다. 아이는 제 방에서 공부를 하다 말고 나와 나의 춤을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관람하며 무언으로 응원해주었다. 아마도 내가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혼신의 힘을 다할 수 있었던 것도 엄마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음악과 하나가 된 자유로운 춤과 몰입감을 보여주며 아이에게 이런 메시지가 전달되길 바랐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마라. 언제든 너 자신이 돼라. 너를 아프게 하고 속박했던 모든 말들을 털어내고 당당히 너의 길을 가라. 너 자신을 믿어라. 너는 너 자체로 온전히 아름답다.’

     

  춤이 끝나자마자 딸아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너무 아름다웠어요. 야생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한 마리 검은 말 같았어요. 진짜 하나의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았어요.” 그 누구의 피드백보다 영광스럽고 의미가 있었다. 아이는 나를 닮아 타인의 눈을 많이 의식하고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며 완벽주의에 자기 검열도 심한 편이다. 그래서 마음의 긴장도가 높고 굳어 있는 만큼이나 몸도 굳어 있는 편이었다. 초등학생이 된 이후 춤추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으니까.

      

  아이도 춤을 통해 자신의 몸과 친해지고 몸을 통해 마음을 보길 바랐다. 엄마처럼 몸치여도 자기만의 흥과 필로 몸을 움직여 춤이라는 것을 만들고 출 수 있으며 거기에서 해방감을 맛보는 걸 몸소 보여주고 싶었다. 뜻은 통했다. 아이는 언젠가부터 유튜브를 TV로 연결하여 여자 아이돌들의 춤과 운동 유튜버들의 춤을 따라 하며 춤에 푹 빠졌다. 이제는 발레까지 배우며 안 쓰던 몸을 쓰면서 조금씩 내적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낀다. 춤은 분명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마법의 양탄자다.  

    


  사실 내 아이에게 춤을 전도할 정도로 춤의 매력에 빠진 계기가 있었다. 2년 전 글쓰기 모임 동기들과 함께 떠난 북투어에서 마음 치유 센터 대표이신 수냐님을 통해 춤 명상을 체험했었다, 처음에는 달빛 아래에서 몽환적인 인도 명상 음악에 맞춰 수냐님의 춤 동작을 따라했다. 이어서 두 명씩 짝을 이루고 서로 거울이 되어 동작을 따라했고 이후에는 다 같이 큰 원을 만들고 한 명씩 원 가운데로 들어가 춤 동작을 하면 모두가 따라 하는 형식을 취했다. 우리는 모두 맨발이었고 자신이 허락한 만큼 가면을 벗어 던졌다.  

    

  마지막에는 자유롭게 춤을 추었는데 이 순간에 나는 처음으로 타인의 눈을 모조리 떼어버리고 나 자신도 놓아버리고 무아지경에 빠지는 체험을 했다. 완벽한 자유로움! 함께 추는 춤이 끝났는데 나는 끝나지 않았다. 대자연 속에서 홀로 춤과 사랑에 빠져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밤의 냄새, 풀이 닿는 감촉, 바람을 가르는 소리, 달빛 아래 내 몸의 그림자 등에 매혹되어. 마치 창조적인 여성의 원형인 아프로디테가 내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춤추는 나>

  그날의 기이한 체험은 나를 최보결 선생님의 ‘털기춤’으로 이끌었다. 우연히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털기춤 영상을 보고 집에서 바로 해보기 시작했다. 방문도 닫고 눈도 닫고 몸과 마음만 활짝 열고. 최보결 선생님이 책에서 언급한 털기춤의 원리와 효과는 이렇다. “몸을 살살 위아래로 흔들고 털면 뼈가 흔들려 그 진동들이 파동을 일으키고 온몸으로 퍼져나가 굳어 있던 뼈와 근육이 말랑말랑해지면서 마음까지도 말랑말랑해진다. 뼈 사이사이에 끼어 있던 오래 묵은 독소들이 빠져나가고, 긴장된 근육이 움켜쥐고 있던 억압, 두려움, 분노와 슬픔의 감정들이 풀려나가기 시작한다.” 

     

  맞다. 뼛속 구석구석에 끼인 감정 찌꺼기까지 빠져나온다. 개운하다. 스케일링한 것처럼. 내가 직접 경험한 털기춤은 몸에 예의를 갖춘 춤이자 배려의 춤이었다. 처음에 몸을 천천히 털며 미세한 진동을 몸에 보내는데 나는 이게 몸에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다. “똑똑, 몸아, 나는 이제부터 털기춤이라는 걸 출 거야. 몸 이곳저곳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게 될 텐데 놀라지 마. 너와 더 친해지려는 거야. 너를 더 자유롭게 해주려는 거야. 널 치유해주려는 거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트로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털기는 손끝에서 목, 어깨, 팔, 양팔, 다리, 발, 온몸으로 향한다. 점점 격동적이고 더 자유롭게. 마치 행사장의 춤추는 풍선 인형처럼.     

   

  정말 신기했다. 털기춤을 할 때마다 순간적으로 무아를 경험했고 저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거의 6개월 동안 주 2~3회 정도 털기춤을 추면서 내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춤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설거지를 하다가, 빨래를 널다가, 출근하다가, 직장에서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차 안에서 운전하다가.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카이스트 스님인 도연 스님은 제대로 명상을 하고 있을 때는 오히려 기운이 넘치게 되며 신나고 재밌는 놀이로 느낄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춤명상이 딱 그렇다. 이하이의 ‘한숨’처럼 슬픈 노래든, 아이유의 ‘팔레트’처럼 신나는 노래든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막 흔들면 된다. 우울할 때 기분 전환하기에 이만한 약이 또 있을까.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했던 말을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아무것도, 아무도 안 믿어요. 오직 조르바만 믿어요.…… 내가 조르바를 믿는 까닭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놈이기 때문이죠. 나는 오직 그놈만을 잘 알 뿐, 다른 것들은 모두 헛것들이에요.” 춤명상을 하면서 내 안의 내가 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도 그 자리에서 바로 털어내면서 내가 내 몸과 마음을 조정할 수 있는 주인이라는 경험을 했다. 춤을 추다 보면 현재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내 몸과 춤만 남는다. 나머지 생각들과 감정들과 주변의 모든 것들은 다 헛것들이 되어버리는 거다.  

카잔차키스 영화 속 장면 <출처 : #하루천자-조현미 콘텐츠팀장의 사설>

    

  몸은 우리가 이번 생에 빌려 쓰는 집이라고 한다. 이제 그동안 우리가 대여한 이 비루한 몸에 걸친 가짜 옷은 벗어 던지자. 대신 그 몸에 ‘애쓰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명상이 되는’, ‘단순하지만 확실히 순수해지는’ 춤 명상을 입히자. 아디야샨티는 진정한 명상은 어떠한 기법에 숙달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를 포기하는 것이라 했다. 춤 명상은 별 기법을 익히지 않아도 된다. 그냥 막춤을 추다 보면 모든 부정적인 것들에 반응하지 않고 그것들이 스스로 붕괴되는 것을 알게 된다. 이거야말로 진짜 명상이 아니겠는가. 어찌 됐든 무슨 명상이든 하고 보자. 하다 보면 마음의 주름은 다 펴지고 빛나는 나를 되찾을 것이다. 마침내 치유는 끝났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두 번째 삶을 멋지게 살아내자. 두려움 없이 더 용감하게 자유롭게. 삶 속으로 당당히 뛰어 들어가 우리의 잠재력을 펼치며 살자.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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