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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차 Jul 25. 2020

너무 힘든 날엔 그냥 그림을 봐요

그림을 마주 보며 스스로에게 무엇을 느끼는지 질문하는 일은, 그리고 그 대답에 귀 기울이는 일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작고 미약할지언정, 자기 자신에게 살아있다는 실감을 선물하는 일이 될 수 있으니까요.

                                                                                   -최혜진의 「우리 각자의 미술관」 中에서-   

  

  사람이 아니라 그림에게 내 마음을 들킨 적이 있나요? 마음을 흔들어 눈물이든 웃음이든 짓게 만드는 그림. 저 깊은 내면의 나에게 말을 거는 그림. 나도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다시 일어서게 해주는 그림을 만난다는 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인지. 나에게 그림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한 첫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이다. 한참 취업 준비를 하던 대학교 4학년 때 우연히 백화점 홍보팀에서 근무하는 한 선배가 VIP 선물용으로 기획해서 나온 거라며 탁상용 달력을 내게 주었다. 

  “알지? 구스타프 클림트. 그의 유명한 대표 작품들로만 엮은 거야. 예쁘게 빠졌더라.” 


  선배가 이 화가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투로 시니컬하게 말하는데 대뜸 모른다고 하기가 그랬다. 비문화인처럼 비칠까 봐서. 하지만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 색채들과 무아지경에 빠져있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압도되어 내 두 눈에는 그 그림을 처음 본 티가 여실히 드러났을 거다. 20년도 넘은 오래전 일이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세 가지 생각만은 선명하다. ‘아, 나도 이런 키스를 한 번 해보고 싶다’와 ‘이 그림을 실제로 보고 싶다’ 그리고 ‘클림트라는 이 화가를 더 알고 싶다’ 물론 그 이후 나는 이 세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루었다. 그 키스의 주인공은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에서 예쁜 가정을 꾸려 잘 늙어가고 있겠지. 클림트에 대해서는 책들을 사서 읽게 되며 ‘그림의 뒷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구나’를 발견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클림트보다 그의 제자인 에곤 실레라는 화가와 그의 작품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20대 중반에 친구와 함께 간 유럽 배낭여행 중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키스>의 실제 작품을 관람했으니 소원은 제대로 이룬 셈이다.      


  사실 진로를 끊임없이 고민하던 이십 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진로 못지않게 중요한 화두는 바로 ‘사랑’이었다. 심리적 결핍을 완벽하게 채워줄 단 한 사람, 완벽한 일체감을 느끼게 해 줄 소울메이트를 찾는 일. 지금은 그런 완벽한 대상은 세상에 없으며, 내 안에 존재하는 아니무스(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와의 통합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천둥벌거숭이처럼 철없이 헤매던 시절에는 내 남자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아마도 그러한 낭만적 로망을 클림트 작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이루고 싶지 않았나 싶다. 클림트에 대한 사랑은 결혼과 동시에 시들해졌지만 그는 나를 미술의 세계로 입문하게 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의 즐거움을 최초로 알게 해 준 첫 화가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인 <키스>와 <다나에>, <여성의 세시기>가 전사된 타일로 인테리어를 했던 신혼집, 그 공간과 그 시간은 그의 작품에서 품어져 나오는 기운 덕분에 지금의 딸을 임신하는 축복을 받은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한 동안 그림에서 철저하게 멀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그림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게 아마도 아이가 다섯 살 무렵 정도인 것 같다. 미술관에 가서 콧바람을 쐬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아이에게 미적인 감각과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감성을 길러주고 싶은 교육적 의도가 더 컸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미술관 관람이 아이 위주였기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그림과 마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가면 행복했던 이유가 일상에서 벗어나 조금은 느리게 나만의 걸음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림은 소통과 공감의 대상이라기보다 일상의 탈출구, 비현실 세계로의 도피의 수단이었다.     


   그림과 내면의 대화를 나누자

  그림을 통해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고, 그림과 내면의 나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첫 경험은 바로 천경자의 그림을 통해서이다. 십 년 전 육아로 힘들어하던 시기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그녀의 이국적인 그림들을 처음 마주했었다. 첫 느낌은 아름답다 라기보다 왠지 쓸쓸하다는 거였다. 화려한 색채와 강렬한 붓터치 사이사이 흐르는 상처와 고독의 모세혈관을 보고야 만 것이다. 조용히 흐느꼈었다. 제 멋대로 올라오고야 마는 울컥함을 꿀떡꿀떡 삼키면서.

머리에 화관을 쓴 슬픈 눈의 여인들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울어도 괜찮아. 울어. 많이 힘들지? 네가 없어진 것 같지? 그래도 그 시간들도 곧 지나갈 거니까 조금만 버텨. 그러고 나면 너도 네 날개를 펼칠 시간이 꼭 올 거야.”

  특히 서른다섯 마리의 뱀들이 뒤엉켜있는 <생태>라는 작품은 내게 이렇게 말을 하며 삶을 살아낼 용기를 주었다.

  “지금의 너 자신이 나처럼 징그럽고 혐오스럽지? 그렇지만 그건 네가 만들어낸 거짓 환상이야. 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내가 다리도 없이 기다란 몸만 있고 차가운 비늘에 뒤덮여 있는 이상한 몸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나는 나야. 그게 나야. 그게 너고. 이렇게 비슷한 숙명을 가진 종족들끼리 뒤엉켜 살며 서로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살면 되는 거야. 그러니 너답게 살아. 너를 너대로 바라봐주는 사람들 속에 가서 행복하게 지내. 괜히 발 달린 짐승들 부러워하면서 괴로워하지 말고. 그냥 너 자신에게 만족하고 지내는 거야. 그게 삶이야.”

  그때 처음으로 느낀 그림과의 짧은 교감은 절대 잊을 수 없다. 그 이후 나는 그림이 가진 생명력과 치유력을 강하게 믿게 되었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은 치유를 넘어서 창조하는 삶으로의 도전을 꿈꾸게 했다. 그녀의 작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고통의 적나라한 은유’ 딱 그거였다. 그녀는 자신의 생살을 찢고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소용돌이와 혼돈 속에서 고통의 실체를 산 채로 잡아온다. 이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고통에 은유와 색을 입혀서 이 괴물을 서서히 정복해 나간다. 지독한 슬픔 뒤에 숨지 않고 붓이라는 무기를 들고 슬픔과 정면 승부한 여전사! 자신의 상처를 그림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아픈 영혼들을 치유해주는 상처 입은 치유자! 그녀를 닮고 싶었다. 나도 내 마음에 있는 알 수 없는 괴물을 산 채로 잡아 은유로 포장하여 벽에 걸어두고 싶었다. 그게 시로 표현될지 글로 표현될지 모르겠지만(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으니) 내 눈물이 고여 있는 글을 읽고 누군가도 나처럼 위로받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작은 꿈을 꾸었었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그렇게 내 안에 있는 창작의 본능에 작은 불씨를 지폈다.       


  내가 있는 곳을 나만의 미술관으로 만들어라     

  나는 그림을 미술관에 가서 봐야만 제 맛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미술관은 차갑고 도도하며 불친절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러나 그곳을 조금은 따뜻하게 덥히고 관객과 그림 사이에 실 전화기로 연결해 주는 천사가 있다. 열심히 공부하고 암기해서 그들만의 해설로 풀어내는 그림 이야기는 그림에 겹겹이 덮여있는 베일을 한 꺼풀 벗겨내준다. 그들의 수려한 말솜씨와 그림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가장 중요한 친절한 애티튜드는 점점 그림 속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고 그림 속 배경이 현실로 펼쳐지도록 우리의 눈과 뇌에 발동을 건다. 타임머신을 태워 그림이 그려진 그 시대로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파일럿! 바로 도슨트다. 하지만 천사 같은 도슨트를 만나는 행운을 항상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바쁜 일상 속에서 미술관에 한 번 가려면 큰 맘먹고 가야 하므로 여간 시간을 내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그림을 통해 내면의 나와 조우하는 즐거움을 맛봐버린 나는 그림 보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격으로 다른 대안책을 찾았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미술과 관련된 책을 읽는 것! 그 책을 읽는 공간은 어디든 그곳이 바로 나만의 편안한 미술관이 되었다. 

     

  미술과 관련된 책을 읽는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다양한 분야의 도슨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 각자가 가진 배경 지식, 삶의 경험, 글을 쓰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그림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을 듣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프리다 칼로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자화상>에 대한 그림에 대해서 이주은 미술사학자가 「그림에, 마음을 놓다」에서 해석한 그녀의 슬픔은 프랑수와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소설 속 슬픔에 빗대어 기꺼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초연함으로 들린다. 반면에 박연준 시인이 「밤은 길 고, 괴롭습니다」라는 책에서 해석한 프리다 칼로의 슬픔은 처절하고 단호하게 끊어내겠다는 비장함이 느껴진다. 이처럼 작가가 어떤 분야에 발을 담그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림을 풀어놓은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므로 그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그림을 더욱 풍성하게 만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덤으로 내면에서 일렁이는 마음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줄 아는 안목까지 얻었다.  

    

  한없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한껏 울고 싶은 날이 있지 않는가? 그런 날엔 정여울의 「빈센트 나의 빈센트」 속 <슬픔>과 <영원의 문>을 들춰본다. 애잔한 마음으로 그림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쏟고 나면 어느새 마음이 한결 정화된 기분이 든다. 고흐의 그림뿐만 아니라 그 그림 속 절망에 대해 연민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풀어낸 작가의 해설이 더해져 마음이 일순간 따뜻해진다. <슬픔>이라는 작품 속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그녀가 내게 이렇게 말을 건다. “왜 또 뭣 때문에 그리 슬픈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니?” 그러면 나는 주저리주저리 내 마음속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마구 뱉어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내 말을 듣던 착한 그녀는 자신의 슬픔을 잠시 접어두고 그 가늘고 앙상한 팔로 나를 꼭 안아주며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그런 날도 있는 거야. 오줌이 차서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처럼 눈물샘에도 눈물이 꽉 차서 내보내야 하는 타이밍인 거야. 그뿐이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내보내고 나면 개운해질 거야.” 우리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다가 마지막에는 꼭 감사로 끝이 난다. 

  “언니는 눈물샘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내 작은 슬픔을 위로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언니도 더 아프지 마요.” 

  그녀의 온몸에 배어있는 슬픔을 어루만진다. 쓰다듬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온기로 저 깊숙한 슬픔까지 녹여낸다.     


   두 번째로 그림을 편하게 만나는 공간은 바로 유튜브와 앱이다. 먼저, <서정욱 미술 토크>는 서정욱 갤러리의 관장님이 직접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다. 그녀는 그림 감상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림의 뒷이야기를 설명해준다. 그림을 오랫동안 화면에 띄어놓기 때문에 굳이 멈추지 않고도 설명을 들으면서 충분히 감상할 수 있기에 나처럼 느긋하고 여유 있게 감상하는 것을 선호하는 달팽이과들에게는 가장 최적의 공간이라 하겠다. 주로 늦은 밤에 접속하는데, 듣고 있으면 그 우아함에 취해 어느새 잠님이 눈꺼풀에 내려앉는다. 사실 잠만큼 마음속 파도를 빠르게 잠재우는 것이 또 있으랴. 잠재우기 신공!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만약에 그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미술사와 미학에 관심이 있다면 그녀의 강의를 딱 한 번 들어보라. 15분 내외로 짧지만 쉽고 은근 재미가 있다. 천천히 책을 넘기며 읽는 것 같아서 마치 e북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전공도 아닌데 굳이 피곤하게 미술사까지 알아야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좀 더 많이 소통하고 싶기에 미술사 강의를 가끔 듣는다. 적당히 듣기! 이해 안 되면 패스! 부담감은 전혀 없다. 시험 볼 것도 아니니까.    

 

  <널 위한 문화예술>은 젊은 여성 에디터가 작가와 작품의 뒷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재구성하여 비교적 빠른 속도로 들려주는 유튜브 채널이다. 호기심을 유발하는 각각의 영상의 주제도 매력적이고 내용도 상당히 알짜배기로 이루어져 있다. 10분 내외의 짧은 영상을 다 보고 나면 심장 박동 수가 급격히 상승하고 미술관을 한 바퀴 뛰면서 관람한 기분이 든다. 살짝 어지럽기도 하는데 이건 순전히 나이 탓인 듯, 영상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특히 내가 빠뜨리지 않고 듣는 것은 이번 달에 꼭 가볼만한 전시 Top4나 미술과 관련된 책을 소개해주는 영상이다. 이 채널은 주로 낮에 기분이 다운되었거나 몸이 피곤할 때 접속하게 된다. 그러면 눈과 귀가 번쩍 뜨이면서 드링크제 한 병을 마신 것 같은 효과가 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겠지만.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이 있다

  세 번째는 작은 액자 그림이나 명화 달력을 내 책상 주변에 비치하는 거다. 정신없이 일을 하거나 머릿속이 복잡하고 짜증이 나려고 할 때 잠시 고개를 들어 액자 속 그림을 보면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하던 일과 생각을 멈추고 호흡을 하게 된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그렇게 대여섯 번을 하다 보면 조금 차분해지면서 불과 몇 분 전보다 힘을 빼고 더 여유 있게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요즘 내 책상 위에 걸린 달력은 문숙의 「위대한 일은 없다」 책을 구입했을 때 사은품으로 받은 그림 달력이다. 모든 그림들은 먹물로 선과 점만을 이용해 단순하게 꽃이나 풀, 바람 등의 자연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이 달력 속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산사의 다과 방에 앉아 맑게 우려낸 녹차 한 모금을 마시며 고요히 하얀 구름을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힘을 빼렴. 힘을 더 빼렴.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달력 속 그림은 그렇게 나에게 최면을 거는 듯하다.  

    

  최근에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온 그림이 있다. 다름 아닌 조지아 오키프의 <흰 독말풀>이다. 김선현의 「그림 처방전」을 읽다가 알게 된 그림으로, 보는 순간 커다란 꽃 잎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림에게 질문하며 첫 대화가 시작되었다.

  “저를 부르셨나요?”

  “그래, 맞아, 나를 더 깊게 들여다보렴.”

  “여기가 어디인가요?”

  “너의 마음속이야. 네가 열심히 네 내면을 들여다보고 닦고 버리고 채우기를 반복하더니 영혼이 많이 깨끗해졌구나. 나는 네 마음속에 피어난 꽃이야. 이제 당당하게 피어나 네 뜻을 펼치렴. 높이 솟아오르렴. 네 안에 잠자고 있던 또 다른 너를 깨우렴. 그녀를 깨우는 일은 그 누구도 아닌 네가 해야 해. 네가 그 아이를 세상 밖으로 끌고 나오렴. 그 아이도 준비하고 있었어.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지. 바로 지금이야.”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럼, 당연하지.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40*30 크기의 캠버스 액자 속 하얀 꽃 그림은 그렇게 매일 나를 쳐다보며 나를 응원해주고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내 입 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손에 힘이 쥐어지는 것을 느낀다. 이처럼 그림은 내 내면을 정확히 비춰주는 신비한 거울이자 다시 생기발랄하게 지낼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주는 내 전담 심리 멘토와 같다. 그래서 그림은 매일 곁에 두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마음을 위한 자양강장제는 몇 병정도 마시면 되냐고? 하루 일 그림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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