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사람은 나다.
내가 죽으면 나의 우주도 문을 닫는다.
세상은 내가 감각하는대로 펼쳐지는 무대다.
평생 주인공 자리에 앉아 한 번도 벗어나본 적 없기에,
인간은 스스로를 틀림없는 '주체'라고 확신해왔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정말 사실일까.
숨을 멈추고 관찰을 늦춰보자.
사건이 발생한다. 감정이 일어난다. 충동이 방향을 만든다. 행동한다.
이후 말한다. "내가 선택했다" 고.
이처럼 선택은 생각의 결과가 아니다. 충동의 부산물이다.
환경, 기억, 기질, 관계, 두려움, 기대같은 요소들이 한 지점에서 충돌할 때
서로 다른 방향의 압력이 생기고, 그중에서 가장 낮은 저항을 가진 경로가 자연스레 열린다.
인간은 많은 경로 중 가장 아프지 않고 마찰이 적은 방향을 찾아 나아간 뒤,
뒤늦게서야 '나의 선택이었다' 덧붙이는 것이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긴 한 걸까.
이 논리에서 우주는 인간에게 '자유'를 재정의하라고 요구한다.
자유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경로로 흘러가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
관찰조차 없으면 선택이 최소 저항 경로로 자동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찰을 배제한 ‘나’의 원형은
자유를 가진 실체가 아니라, 정렬된 감각의 집합이 된다.
기억의 연속성, 감정의 일관성, 이야기의 누적이 만들어낸 중심점.
사건을 통과하는 일종의 플랫폼인 셈이다.
문제는 인간이 마치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실체인 양 착각한다는 데 있다.
선택이 아닌 것을 선택이라 확신하고,
의지가 아닌 것을 의지라 착각할 때
인간은 고통과 기쁨, 후회와 안도를 자신의 몫으로 떠안게 된다.
하지만 자아와 선택, 선택과 결과,
결과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감정은 언제나 별개로 발생했다.
우리는 그걸 체험적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으나
애써 잊는 중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망각을 유지한 채, 신의 자기 확장을 연속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