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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기시대 Jul 25. 2019

아빠의 페미니즘 공부

(프롤로그) 나는 왜 페미니즘을 공부하려 하는가

2017년 결혼을 했고,

그로부터 1년 뒤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가 태어났다


여느 초보 부모들이 그렇겠지만

육아책이나 육아 블로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육아정보나 팁들은 많지만

글로만 배운 육아는 어설프기 짝이 없고

책에서 나온 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것만 같아

답답하고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나마도

아내에게만 육아를 의지하고 있었던

준비도 하지 않는 아빠였다.



어느 날

TV에 나오는 여성 관련 범죄 뉴스(아마 몰카

범죄였던 것 같다)를 보다가 아내가 말을 꺼냈다.


"오빠 나는 우리 애가 딸이어서 너무 불안해! 오빠는 불안하지 않아?"


"불안하지..."


"그럼 어떡해야 해?"


"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불안해만 했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사실 아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딱히 불안해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나는

격앙된 아내의 태도에

당황해하면서 더듬거리며

그래도 세상은 바뀌고 있고

딸아이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는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겠느냐 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나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답변과 창피한 태도다)


그 말에

아내는 실망했다

아니, 분노했다


아내는 내가 남자라서 잘 모른다 했다

공중화장실 갈 때면 얼마나 두려운지 아냐고 했다

밤길이 얼마나 두려운지 아냐고 했다

왜 여자만 이런 수많은 피해를 받는 것에 두려워하고 스스로 대비해야 하냐 했다


여자로 살아온 자신은

이 불안함이 너무 싫다고 했다


그보다

딸아이의 앞으로의 삶도

여자로써의 불안함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 속상하다 했다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나는

그저 아내가 조금 예민하다고만  생각했다

엄마라서 딸에 대한 걱정이 더 큰 것이리라 생각했다


너무 모르고 있었고 무관심했다

이런 무관심이

얼마나 큰 위험을 낳는 일인지 전혀 모른 채



나의 직업은 (말이 좋아) 프리랜서였기에,

남들보다 육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돈 벌어오느라 애는 신경도 안 쓰고

아내는 집안일에 육아하느라

경력도 단절되어 버리는

여느 집들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순간

나의 정신 체계는

가장으로써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에만 꽂혀있었고


지금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내보다는 남편인 나였기에

육아의 비중은 아내가 당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육아를 열심히 돕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나는

'남편은 돈 벌어오고 아내는 집안일에 독박 육아'하는

그토록 답습하지 않으려 했던 상황을

너무도 제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서

부부의 갈등도 커져갔다


벗어나려 노력했다


돈을 벌어야 했지만,

일을 줄여가면서까지 육아와 집안일에 소홀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일을 줄여도,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도,

아내와의 갈등은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그나마 하던 일도 그만두고

육아와 집안일에 전념하기도 했다

아이의 목욕은 내가 담당했고,

밥, 설거지, 청소, 빨래 등 기본적인 집안일도 아내와 함께 했다


이 정도면

아내에게도 아이에게도 떳떳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예상했던 대로 생활비는 바닥이 나고,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을 찾아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소홀해진 집안일과 육아로 인해

아내와 갈등이 빚어졌다


이런 상황을 아는 주변의 지인 몇몇은


"애 낳고 5년까지는 원래 그래"

"어떡해 그럼 생활비는 벌어야 할 거 아니야"

"초반이라서 예민해서 그래"

"그럴수록 와이프한테 잘해"


그렇게 치고받고 싸워야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된다는 

일종의 통과의례인 양


내 생각에 문제의 원인은

아내가 육아를 하고

남편은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아내는 육아를 해야 하고

남편은 밖에 나가 돈 벌어와야 한다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이란 말인가?


결국 '존버'밖에는 없다는 것인가?


위로가 되기보다는

되려 답답함만 커져갔다




그렇게

쌓여가는 스트레스는

돈 없는 신세한탄까지 이르렀다


내가 돈이 많았으면,

모아놓은 돈이라도 좀 있었으면,

내 집이라도 있었으면,

집세라도 아껴서 생활 비하면 되는데

내가 다니는 직장 있었다면,

요즘 세상에 유급으로 육아휴직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돈에 여유가 있었으면

육아에 익숙해지고

아이가 어린이집 들어가 여유가 생기기까지는

육아에 매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부부 사이도 좋아지지 않을까


난 왜 돈이 없나

우리 집은 왜 돈이 없나


가난은 역시 죄다!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스트레스는 하늘을 찔렀다


다 포기하고 싶었다



첫 돌이 지나고

육아도 조금 익숙해진다고 생각했지만


육아의 문제

부부 사이의 갈등

돈의 문제

낮아지는 자존감


 문제들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순환하며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원인조차 모르는 답답함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들른 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페미니즘에 관한 책이었다.


왜 그 책을 집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의식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리고

그 무의식의 선택 덕분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단 한 권의 책

단 한 번의 독서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생각에 미치는 파장이 커져갔다


익숙했던 것들이

어색해지고,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게 되었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독박 육아?

경력단절?

육아를 돕는다?

아내가 차리는 밥상?

일 하느라 고생한 남편?

집밥 = 엄마 밥

왜 엄마만 생각하면 울컥해지는 걸까?

왜 남자는 돈 벌어와야 하는 팔자일까?


하나씩 늘어난 의문들은

그 의문을 품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듯했다




페미니즘을 공부해야겠다 생각했다


페미니스트라고 불릴 만큼 많이 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페미니즘을, 페미니스트를 운운하고 싶지는 않았다


딸아이의 육아를 위해서

부부 사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나를 옥죄고 있는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


공부하고,

접어두려 한다




2019. 7. 18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최승범 지음)를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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