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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다는 것

by 강석우

어떤 사람이 머리를 깎으러 갔다. 이발사가 한참 살펴보더니 아주 조금만 깎아주더란다. 그래도 머리 모양이 예쁘긴 했지만, 너무 조금 깎는 것이 서운하여 “이렇게 조금 자르고도 돈은 다 받아요?” 그러자 이발사가 “난 깎은 것 가지고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겨둔 것을 가지고 돈을 받습니다.”


잘 남기기 위해선 어떻게 버리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석수가 부처님을 조각하는 것을 “돌 속에 계시는 부처님을 잘 모셔내는 것”이라고 했다. 버리는 것과 남기는 것은 같은 의미인 것 같다. 마찬가지로 채우는 것과 비우는 것도 같은 것이지 않을까.


아들이 그림을 그리는데 온통 도화지에 색을 다 칠한다. 도무지 그림 같지가 않다. 그림은 온통 다 색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곳을 비우느냐가 더 중요할 듯싶다. 비움으로 그림을 그린다.


말하는 것도 그렇다. 쉴 새 없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한마디 하고 나서 이어지는 잠시의 침묵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유명한 연설가일수록 그런 침묵의 시간이 더 길었다는 사례 조사도 있었다.


돈도 그렇다. 많이 벌어 곳간을 채우기만 한 부자보다 그 돈을 잘 쓰는 부자가 더 훌륭한 사람으로 알려진다. 예를 들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24시간을 쉴 틈 없이 달리며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농부가 일손을 멈추고 낫을 가는 것, 책을 읽다가 잠시 하늘을 쳐다보는 것, 숨 가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아이와 노닥거리는 것이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생활을 일로 채우는 것이 잘 사는 삶이 아니라 시간표를 비우는 것, 이 비우는 것이 더 풍요한 삶, 더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런데 바보처럼 바빠서 비우지를 못한다. 바빠서 멈추지를 못한다. 바빠서 생각을 하지 못한다. 바빠서 주변을 살펴보지 못한다. 참 바보처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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