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고 있는 지역으로 이사했을 때 일이다. 불편했던 것들이 단골집을 정하는 것이었다. 이발소, 병원, 식당, 등은 쉽게 정하고 쉽게 바꾸기 어려운 곳들이다. 맘에 드는 곳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성격이 소극적이어서 불편한 것이 있어도 주인에게 시정을 요구하기보다는 속으로 “여기 안 오지 뭐.”라고 지나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어디 맘에 딱 드는 집이 있을까.
동아일보가 광고 없이 나오던 때로 기억한다.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내가 이 땅을 떠야 할 것 같다.”라고 하셨다. “이 땅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문제가 있으면 피한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또 어딜 가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사 아니던가. 그러니 그냥 지나치거나 넘기지 말고 문제를 고쳐야 한다. 예를 들어 집에 문제가 있다고 가출하거나 죽어지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노력하고 서로 고쳐 나가며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절은 절대 고칠 수 없으니까 따를 수 없다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아니다. 중이 떠나가면 그 절은 어떻게 될까. 남은 사람끼리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낼 수 있다는 말인가. 절을 고쳐야 한다. 다수의 의견이 엇갈리거든 시간이 걸리더라도 타협안을 끌어내야 한다. 그것이 발전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것이 더 무섭다. 말이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그냥 지나가게 된다. 그러면서 회복 불능일 정도로 안에서 무너져가는 것이다. 또 말을 못 하는 이유가 대체로 경직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경직된 분위기에서는 다 말을 못 하게 되니 문제로 인해 시끄러워질 기회가 없어지고 해결될 기회도 없어져 결국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 나라를 떠야겠다던 그 목사님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이 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했다. 그 목사님은 많은 일을 하셨고 많은 소리를 내셨다. 시끄러운 일을 많이 만들어내셨다. 절이 싫다고 중이 떠나면 안 된다. 중이 원하는 일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하는 것이 절이니 절이 바뀌어야 한다. 완전히 바꾸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것이니 그 사실을 자기도 인정하면서 자기도 바뀌어야 한다.
말해야 한다.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리고 나오는 말, 제기된 문제를 마음 열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발전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