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방대승불교의 명상
행주(行住) -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
좌와(坐臥) - 앉아있거나 누워있을 때
어묵(語默) - 말하거나 말하지 않을 때
동정(動靜) - (마음이) 거칠거나 고요할 때
흔히들 선(禪) 혹은 참선(參禪)이라고 하면 스님들이 깊은 산속, 고요한 산사의 넓은 방에서 고요히 방석 위에 앉아서 수행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렇게 좌선은 마치 수행의 표본인 것처럼 알려졌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수행이다. 그러나, 좌선은 수많은 수행법 중 하나일 뿐이다.
특히, 화두(話頭)를 들 때, 수행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앉아있을 때만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화두를 들어야 한다. 그러다가 화두가 저절로 들리게 되면, 잠을 자는 꿈속에서도, 꿈조차 없는 잠 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야 의단독로가 되는 것이고, 그래야만 본래의 성품이 드러나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은 여기에 배치된다. 행주(行住)는 몸이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를 의미하고, 좌와(坐臥)는 몸의 자세를 의미하고, 어묵(語默)은 말하거나 말하지 않을 때, 동정(動靜)은 마음이 거칠거나 고요할 때를 의미한다. 그래서 행주좌와(行住坐臥)는 육체적 행위에 해당하고, 어묵동정(語默動靜)은 정신적 행위에 해당한다. 결국 항상 정신과 육체를 언제나 공부에 매진하라는 의미이다.
또한, 우리가 보통 불교에서 업(業)을 얘기할 때,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말한다.
신(身)이란 몸으로 짓는 업이고
구(口)란 입으로 짓는 업,
의(意)란 뜻으로 짓는 업을 의미한다.
행주(行住)와 좌와(坐臥)는 신(身)에 해당하고, 어묵(語默)은 구(口)에 해당하고, 동정(動靜)은 의(意)에 해당한다. 즉, 행주좌와어묵동정에 공부를 지으라는 것은 신구의 삼업을 짓지 않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업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공부하는 것 즉, 화두를 챙기는 것만이 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좌선만이 최고의 수행법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앉아있을 때만 명상이 된다면, 명상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상에서 적용하지 못하고, 앉아있을 때만 된다면, 그것은 명상이 아니라, 명상이라는 이름을 걸고 하는 보여주기식의 명상일 수밖에 없다. 사실 앉아서 하는 명상은 쉽지만 쉽지 않다. 쉽다는 것은 앉아있는 자세라고 비교적 편하다는 것이고, 쉽지만은 않다는 것은 편안한 자세이기 때문에 공부가 되지 않는다. 편안함에 빠져 쉽게 잠이 들고 망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에도 쉽게 굴복하지만, 편안함에도 쉽게 굴복하기 때문이다.
첫째, 화두선·간화선의 가장 큰 장점은 학문적 기반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이 있다. 곧바로 마음의 본성을 향하면, 본래의 성품을 보고 깨닫는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선의 장점은 화두를 통해 돌아가지 말고 곧바로 마음을 향하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이와 더불어, 화두만을 들고 하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수행체계이다. 여기에 학문의 높고 낮음이나 학식의 넓고 좁음이 필요하지 않고, 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가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인간에 대한 평등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사회적·학문적·권력적 위치와는 상관없이 오직 화두를 가지고 하는 평등한 게임인 것이다.
셋째, 역사적으로 검증된 방법이다. 역사적으로 검증이 됐다는 의미는 이 방법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줬다는 것과 설사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부작용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깨달은 스님들을 통해 선(禪)의 유효성을 보여줬고, 또 수많은 깨닫지 못한 스님들을 통해 화두선이 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넷째, 불교의 종교 부분과 상호 보완 관계인 것이다. 불교는 종교 부분과 명상 부분이 있다. 명상적인 체험을 통해 종교적인 활동을 보완하기도 하고, 종교적인 활동을 통해 명상적인 체험을 증진하기도 한다. 보통 말하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라는 불교의 슬로건은 이 의미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한문 위주의 경전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한문은 한국인들에게 사실상 외국어이다. 또한, 한자(漢字)는 중국의 오래된 역사만큼, 표의문자로서 글자 하나에 수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그 역사 속에 주류를 이뤘던 유교(儒敎)의 영향으로 한자는 그 이면에 유교의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경향이 있다. 불교 경전을 해석할 때, 유교적인 개념이 들어가게 된다. 이런 이유로 현대의 한국인들이 경전을 통해, 혹은 해석된 경전을 통해 선(禪)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자의 모호성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둘째, 간화선의 정의와 설명의 모호함이다. 이것은 첫째 이유와 맞닿아 있다. 사실 간화선을 이해하려고 해도, 수많은 한자와 모호한 설명으로 진입장벽이 높다. 원래의 화두선·간화선은 화두를 들고 하는 간단한 방법이었는데,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려워지고 복잡해진다. 또한, 용어의 폐쇄성으로 인해,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렸다.
셋째, 이런 이유로 비논리적 수행풍토가 생겼다. 마치 서로 자신이 깨달은 사람인 양 경쟁한다. 깨달음의 영역을 설명할 때, 요즘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법을 사용한다던가 혹은 마치 본인이 깨달은 사람인 것처럼 설명하기도 한다. 깨달음은 설명될 수 없고, 깨달은 사람은 굳이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단지 침묵하며 시절인연을 기다릴 뿐이다. 그럼에도 깨달음도 없이 언어유희에 빠져, - 특히 어려운 선문답을 사용하며 – 깨달은 척 하는 사람들도 많다.
넷째, 종교와 명상의 개념 분리가 어렵다는 점이다. 앞에서 종교와 명상의 상호보완관계가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종교와 명상의 경계가 희미해서 생기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불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기복적인 종교와 명상적인 수행(선:禪)은 사실 이질적인 존재이다. 같은 단어를 명상의 관점과 종교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많다. 비록 연기설과 업설, 사성제 등의 기본 개념을 양쪽 다 공유하지만, 수행 쪽은 팔정도를 중요시하고 종교 쪽은 육바라밀(六波羅密)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정토종(淨土宗)계열은 종교적인 성향이 아주 강하다. 특히 연기설과는 반대되는 개념의 서방정토 극락세계 (西方淨土 極樂世界) 라는 죽음 뒤의 이상세계를 설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