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章
기업에선, 제대로 고용하기에는 부담스럽지만, 조직에서 부족한 부분을 메꿔 주기 위해 필요한 ‘고문’이라는 직책이 있다.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고문’으로 1년 정도 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퇴직한 사람들에겐 ‘덤’이 되어, 기분 좋은 일이다. 나도 그 시기, 회사를 1년 정도 더 다니게 되었다. 방송 프로그램 관련한 여러 가지 일을 지원하고 코칭해 주면서, 자유롭게 시간을 조정하며 회사를 다녔다.
“고문님, 요즘 운동하세요? 얼굴이 좋으시네요?”
“선배님, 얼굴이 다시 돌아오셨네요.^^”
1, 2년 전부터 갱년기가 시작되어, 매일 벌겋게 오른 얼굴로 직원들과 마주쳤는데,
벌겋게 올랐던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온 걸까?
“그래? 고마워!”
소개팅과의 상관관계가 살짝 떠올랐지만, 상관관계가 어떻든 간에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신이 날 지경이었다.
오전 근무만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강화도 고려산 산행이라면 등산복으로 무장할 필요는 없었다. 가볍고 편안한 옷과 트레킹화 정도면 되었다.
곧 그가 왔고,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랐다.
난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다.
20대 중반에 면허를 갖고, 운전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운전을 하셨으나, 가족들과 여행을 가거나 이동을 할 땐 항상 내가 운전을 했다. 그리고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주로 여성들)의 동행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늘 운전석에 앉아 내가 운전을 직접 했다. 그런데 이날은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고, 남자가 운전을 했다. 설명하기에 좀 복잡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려산 주차장에 도착해서 정상까지 갔다 내려오면 늦으니까, 적당한 곳에서 내려옵시다.”
“네 그러죠. 진달래는 이미 없겠죠?”
“글쎄요 조금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진달래가 있을 거다, 없을 거다, 아니 조금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며 우리는 강화도로 향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을 켜놓은 그의 핸드폰에서 전화가 울렸다.
운전하던 중이라, 스피커 모드를 변경하지 못해 상대방 전화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냐?”
“아, 나 지금 고려산 가는 중이야.”
“흐흐. 그래 잘 다녀와라.”
그리곤 나를 살짝 돌아보며,
“친구예요.”
“아, 네.”
보통 강화도 가는 길은 좀 복잡하고, 많이 막혔던 기억이 있었는데, 이날은 평일 오후여서 그런지 가는 길이 막힘없이 편안했다. 그런데,
‘띠리리리링~’
그의 핸드폰이 또 울렸다.
이번엔 그가 애써, 스피커 모드를 바꾸고 핸드폰을 들어 귀에 대고 통화를 했다.
“그래, 왜에~~?”
“나중에 전화할게.”
“얘가 이혼을 한 친구인데, 얼마 전에 함께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었어요. 지금 우리가 만나는 걸 알고 있는데, 장난하네요. 허허”
첫 소개팅 날, 주선해 준 선배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친구 이야기를 했었다. 베트남 여행을 함께 다녀왔었다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던 것 같다.
“아, 네”
그런데 그 친구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야, 이제 그만해라….”
그는 나의 눈치를 보면서, 겸연쩍게 웃어넘겼지만 나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남자친구들은 특히 어릴 적 남자친구들끼리는 장난을 많이 한다고는 알고 있다. 더구나 여자친구이거나 애인인 상대 여성이 나타났을 때 남자친구들끼리의 장난이 도를 넘기도 하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2, 30대도 아니고, 나이 오십이 된 사람들이 이런 장난을 칠까? 매우 실없어 보였고, 예의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이 사람의 정체가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철모르고 어릴 적 장난하던 그 시기의 버릇,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음흉하게 장난치던 그 철없는 남자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고려산에 진달래는 거의 없었다.
날씨는 그럭저럭 괜찮아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국내에서 인기 있는 SPA 상표의 등산 재킷이 꽤 어울렸던 그의 모습도 좋았다.
조경이 훌륭했던 카페를 찾아, 간단히 피자와 음료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어스름 밤이 찾아 왔다.
집 앞에 다다를 무렵, 그는 꽤 좋은 제안을 했다.
“일주일에 두 번을 만나면 어떨까요?”
“네?”
“평일에 한번, 주말에 한 번 만나는 걸로 하고요, 평일엔 근교로 나가면 좋을 것 같고 주말엔 서울 도심을 나들이 해 보죠.”
이왕 사귀어 볼 거면 자주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제안에 동의했고, 돌아오는 토요일엔 부암동엘 가기로 했다.
“사실, 저는 서울이 이렇게 바뀐 줄 몰랐어요. 제가 기억하는 부암동, 서촌, 인사동의 모습은 다 20년 전의 모습들이에요. 바뀐 모습들을 한번 보고 싶네요. 가이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흐흐.”
산에서 내려온 지 5년이 넘었지만, 본가 부모님을 찾는 일 외에는 서울에 나올 일이 별로 없었다고 했다. 혼자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닐 상황은 아니었고, 어쩌다 한번 서울 도심을 찾았을 땐 상전벽해 한 그 모습에 놀랐었다고 했다.
그는 그 5년 동안 어떻게 살았던 걸까? 무슨 일을 하며 지냈을까?
어릴적 친구들을 가끔 만나면서 실없는 농담으로 장난치며 시간들을 보낸 걸까?
그에 대한 의심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