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章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난 후, 이젠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보통 카톡이나 문자를 보내고 나면, 내 할 일을 바로 하게 된다.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간다든가, 물을 마시러 냉장고로 간다든가, 노트북을 켠다든가. 그러나 그날은 그럴 수가 없었다. 바로 전화벨이 울렸기 때문이다.
그 남자였다.
그는 먼저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면서, 바로 그날 저녁에 만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엉겁결에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00씨가 있는 근처로 가겠습니다. 장소만 알려주세요”
“네. 그러면 문자로 하겠습니다.”
“이따 뵐게요.”
문자를 해도 답이 안 올 수 있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난 곧바로 절친한테 전화했다. 사실 그날 저녁, 친구와의 약속이 있었다.
“00야, 우리, 오늘 저녁 못 만나겠다.”
“왜?”
“그 남자 만나게 되었어.”
“그 소개팅 남자?”
“응.”
“거봐. 연락해 올 거 같다고 했잖아. 알았어. 그게 우선이지 머. 잘 만나고. 전화해.”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약속을 무작정 깨는 건 예의가 아니나, 그 친구는 그 정도의 이유는 무조건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 소개팅남에게 내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가짜뉴스’를 전하며 절친과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친구는 ‘팩트’를 모르고 있다.
만날 장소가 고민되었다. 지난 첫 만남에서 이미 알게 되었지만, 그는 최근에 조성된 거리나 핫 플레이스를 잘 몰랐다.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다. 산에서 문명을 끊고 오래 살았기 때문일 텐데, 그래도 산에서 내려온 지 5년이 넘었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요즘 세상에 대한 정보와 소식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스마트폰을 잘 다루고 있었고, 운전을 잘하는 것으로 보아, 갈 만한 곳을 골라서, 문자로 장소를 찍어 보냈다. 바로 알겠다는 답 문자가 왔다. 바로바로 답하고 문자 받자마자 전화하는 이 남자가 꽤 맘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전화 목소리는 근사했다.
사춘기 소녀 시절,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한참, 「들국화, 어떤 날, 시인과 촌장, 김광석」의 LP를 들으면서 어렵게 라이브 콘서트를 다니던 소녀시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입시 준비로 동네 도서관을 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면 가능하지 않다 싶지만, 인근 레코드 가게에서 기타도 배우러 다녔었다. 그리고 도서관 옥상에서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둥구당가’ 하면서 칼립소 주법으로 기타를 치면서 좋아하는 노래들을 불렀었다. 참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이상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난 기타 치는 남자가 좋더라. 멋있어 ㅎㅎ”
“난 안경 낀 남자가 좋은데…. 그 오빠 알지? 안경이 참 잘 어울려. ㅋㅋ”
그리고 난,
“난, 목소리 좋은 남자가 좋아. 특히 전화 목소리…!”
소녀 시절, 다소 장난스럽게, 재미 삼아 이상형의 남자를 그려봤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내 마음을 움직이는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난 것이다. 먼저 연락 못 해서 미안하다는 얘기로 시작한 그 남자의 전화 목소리는 그 톤과 분위기까지 어우러져 마음속 깊이 다가왔다. 그리고 결혼한 지 4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서교동 언저리에서 우리는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저녁 식사를 한 후, 합정동에 있는 커피가 맛있는 베이글 카페로 들어갔다. 주말 저녁이라 그런지, 좁지 않은 공간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1층에 자리가 없어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엔 아주 작은 테이블과 등받이 없는 의자들이, 여유 공간이 없이 다닥다닥 붙어 배치돼 있었는데, 동행한 사람들이 구분이 안될 정도로 섞여 앉아 대화하는 젊은 남녀와 연인들의 모습은 무척 자유롭게 느껴졌다.
마침 구석에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 우리는 사이에 가로막힌 게 없이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젊은 사람들처럼 우리도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 갔다. 두 번째 만나는 남녀의 모습은 아니었을거다. 카페 어딘가에 있었을 CCTV에 담긴 우리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바라보며, 호감이 간 눈빛을 주고받고, 마치 마법에 홀린 듯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사실 두 번째 만남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이야기 내용은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그러나, 얘기하는 중간중간, 나에게 강한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의 시선에서 감지했고, 나 또한 그에게서 강한 끌림을 갖게 되었다.
3,40대의 나에게 ‘결혼’이나 ‘남자’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자, 대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것들을 늘 한 켠에 미루어 놓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제2의 시니어 인생을 설계해야 하는 시기가 오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런 올드 싱글의 삶에, 느닷없이 ‘설렘’도 함께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