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링!”
첫 만남 이후 일주일이 지난 토요일 늦은 오전에 문자가 왔다.
보통의 경우, 토요일에 문자가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친구 대부분은 다 가정이 있었고, 그런 친구들과 주말에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더구나 나는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말은 혼자 보냈다.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혼자 가까운 검단산이나 예봉산 혹은 운길산을 올라갔다. 보통 새벽 5시쯤 일어나 준비한 뒤, 등산하고 내려오면 10시나 11시 정도가 되었고, 낮에는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공부하고, 저녁엔 TV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하남에서 알게 된 후배가 밥이나 먹자고 연락이 오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카톡이나 전화하기는 해도 문자로 연락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날은 오전에 한강변을 따라 산책하고 돌아와서 쉬던 중이었다. 늘 그렇듯이 점심 준비를 생각하면서 습관적으로 TV를 켜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문자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도 스팸 문자라고 생각해서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TV를 보려고 했다. 그런데 순간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고, 얼른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살펴봤다.
사실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그녀의 전화번호는 지워 놓은 상태였고, 연락이 먼저 오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질 않았다. 그런데 문자를 확인해 보니,
‘안녕하세요? 전 000인데요. 언제 등산 한 번 같이 하실래요?’
라는 내용이었다.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뒤통수에서 등을 따라 허리까지 무언가 관통하는 느낌이 들면서, 강렬한 운명을 예감했다.
‘아! 이대로 이 친구와는 끝까지 가겠구나. 이 사람이 내 사람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의 실타래가 있다면, 각자의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의 실이 서로 만나고, 하나로 엮어져서, 새로운 실타래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든 이후 바로, 나의 처지, 경제적 상황, 산(절)에 대한 그리움 등등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런 생각들을 애써 떨치며, 먼저 문자를 하게 한 미안한 마음에 바로 전화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지난 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XXX입니다. 잘 지내셨죠? 문자 받았어요. 근데, 오늘 시간 되시면 저녁, 같이 하실래요?”
“네~. 안녕하셨어요. 오늘요? 오후에 약속이 있는데, 저녁은 될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어디서 저녁을 먹어야 할지 잘 몰라요. 적당한 장소 아시면 그리로 갈게요. 아니면 아예 제가 댁 앞으로 갈게요. 거기서 같이 가요.”
“네. 그럼 5시에 집 앞에서 기다릴게요.”
그렇게 순식간에 문자가 왔고, 전화를 했고, 약속을 잡았다.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방구석에서 TV를 보며 주말을 보내고 있었고, 불과 10분 전까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전화를 끊고, 저녁 약속에 대한 설렘보다는, 인생에서의 필연적 만남에 대해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내가 알 수 없는, 삶의 흐름이 시작된 것 같았다. 내가 외면하려 했던 방향의 인생이 다시 내 앞에 펼쳐진 것이다. 아마도 그녀에 대한 나의 호감도, 그녀의 나에 대한 호감도 나 스스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경제적 능력과 산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이 그런 마음을 애써 외면하게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외면했던 마음이 그녀의 문자로 인해 힘을 잃게 되었고, 외면했던 방향의 인생이 확실한 예감으로 다가왔다. 두 번째의 만남을 갖는다면, 이 방향으로 계속 인생이 진행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묘한 것은 이날의 기억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문자가 오고 전화를 하는 폭풍 같은 시간이 너무 강렬해서일까? 꽤 오랜 시간을 같이 있었는데 무슨 대화를 했는지 잘 기억나질 않고, 몇 개의 단편적인 기억밖에 없다.
첫 번째 기억은 그녀가 첫날보다는 꽤 이쁘게 차려입고 나온 것이다. 정확한 복장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파트 상가 앞에서 기다리던 그녀를 처음 발견했을 때, 첫날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무언가 화사했고 무언가 세련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문득 ‘그날은 정말 나오기 싫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웃음 지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기억은 더 엉켜있다. 같이 식당에 간 것만 기억이 나고, 무슨 밥을 먹었는지, 그다음에 무슨 카페를 갔는지 전혀 기억이 전혀 없다. 그러나, 그녀가 첫날 식사비에 대한 답례로 식사비용을 계산한 것은 기억난다.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완곡하면서 단호하게, 자기 의사를 밝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태도는 첫날의 호감도를 더 올리는 역할을 했다.
세 번째는 등산을 가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다음 주에 강화도에 있는 고려산으로 진달래를 보러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