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章
그 당시 내겐 친하게 지내던 친구 녀석이 하나 있었다. 국민학교 동창인데, 이 친구와의 인연도 꽤 질기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짝이었던 친구이다. 다른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자주 만나며 친하게 보냈는데, 내가 고3 때 강남으로 이사를 하면서 연락이 끊겼었다. 이 친구뿐만 아니라 국민학교, 중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일부와도 연락이 끊긴다. 친구들 전화번호를 적어 놓은 작은 수첩을 이사하면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대학교 1학년 말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과 그 당시에는 ‘닭장’이라고 불리는 나이트를 갔는데, 우연히 거기서 이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다. 재수를 했던 친구는 재수학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같이 왔다가 나를 만난 것이다. 그렇게 이 친구와의 인연은 다시 시작된다.
이 친구의 특징은 순진하진 않지만 묘하게 순수한 구석이 있는 친구였다. 그래서 같이 있으면 재밌기도 하지만 속이 터지기도 하는,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지지 않는 그런 친구였다. 그리고 내가 산에 있을 때, 찾아온 친구가 2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친구를 만나면 묘하게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서로 장난치고 놀리고 짓궂게 굴고, 적당하게 욕도 섞으면서 놀게 된다. 그러면서도 서로 웬만하면 마음의 앙금이 남지 않는 그런 친구였다.
내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 친구는 한 집에서 아내와 별거 중이었다. 대화도 없고 방도 따로 쓰는 상태였다. 아이들을 통해 얘기를 전하거나, 문자로 의사소통했다. 그리고 서로의 사생활을 전혀 터치하지 않는 사이였다. 서로 밤에 무엇을 하든 아니면 새벽에 들어오든 혹은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서로 터치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서 서로 적당한 관계 속에서 삶을 이어 가는 그런 부부였다. 그래서 다른 유부남 친구들보다는 자유로웠다. 그렇게 결혼생활을 유지하다가 3~4년 뒤엔 결국 이혼하게 된다.
이 친구는 중학교 때 88올림픽을 대비한 ‘88꿈나무’라고 하는 운동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모아서 ‘꿈나무’로 선발하는 시스템이 있었는데, 우리 학교 대표로 나갈 정도로 운동도 잘하고 건강한 친구였다. 국민학생일 때, 턱걸이도 30개 이상 했고 몸도 단단해서 체조선수 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병약했던 나와는 완전히 반대인 친구였다. 싸움도 꽤 잘해서, 은근히 나를 보호해 주던 의리도 있는 친구였다.
그런데 나는 산에서 살면서 마음도 몸도 건강해진 상태인 데 반해, 이 친구는 삶과 결혼생활에 치여서인지, 전체적인 몸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체력도 바닥이었고, 술 때문인지 몸의 상태가 푸석푸석한 느낌이었다. 이 친구는 이즈음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불면증이 심했고, 밤과 낮이 바뀌어 있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이해관계가 잘 맞았다. 나도 등산하는 것을 좋아했고, 친구도 몸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내가 이 친구를 이끌고 등산하러 다녔다. 내가 살던 하남 미사에서 가까운 곳에 검단산이라는 산이 있었는데, 나는 이 산을 주로 올랐다. 친구는 그런 나를 따라 등산하겠다고 했고,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같이 어울리면서, 친구는 체력을 조금씩 회복해 갔고, 나중에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어 소백산 같은 큰 산도 같이 등산하기도 했다.
두 번째 만남 이후에 일상처럼 이 친구를 만나서 그간의 상황을 얘기했다. 그녀가 문자를 보낸 것, 바로 전화하고 만난 것, 그리고 고려산에 가기로 한 것, 등등. 친구는 나의 연애를 전폭적으로 응원했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했다. 연애를 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내가 연애를 시작한다는 사실에 대해, 그리고 홀아비 마음을 과부가 안다고, 혼자서 살고 있는, 내 상태를 이해해 주고 지지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될 놈은 그냥 다 돼요. 젠장….”
“야! 때려 쳐! 여자가 아깝다. 왜 이런 여자가 너 같은 백수를 만나냐?”
“아, 씨~. 부러워 죽겠네.”
“야! 잘되면 새끼 쳐라!”
“근데, 잘 해봐. 인상이 좋다. 느낌도 좋고. 놓치지 마.”
이렇게 원초적인 방식으로 부러워하면서도 지지해 주었다.
고려산을 가기로 한 날 오전에, 이 친구에게 자랑삼아 전화했다.
“얌마! 나 오늘 등산데이트하러 강화도 고려산에 간다. 부러워하라고 전화했다. 흐흐.”
“아침부터 염장질이냐?”
“그렇지. 염장질하는 거지. 흐흐.”
“잘 다녀와라. 잘되면 새끼 쳐!”
“그래, 네가 심심하겠다. 내가 안 놀아줘서.”
“염병! 나도 혼자 잘 논다. 그리고 같이 놀 친구들도 있다.”
“알았어. 잘 다녀올게.”
그날 오후에 그녀를 픽업해서 고려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이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냐?”
“산에 가는 중이다.”
“잘 다녀와라. 흐흐.”
그렇게 간단하게 대화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조금 뒤에 두 번째 전화가 왔다.
“왜?”
“그냥, 잘 다녀오라고~. 흐흐.”
“장난하지 마라. 나중에 통화하자.”
전화를 끊고 나니, 그녀에게 약간 눈치가 보였다. 이런 짓궂은 장난을 설명하기도 난감했다. 사실 우리 사이가 아직은 어색하기도 해서,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에 신경을 쓰는 상황이었는데, 이 친구의 전화가 우리 대화에 맥을 끊는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 녀석이 이렇게 두 번으로 끝날 놈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의 간격을 두고 세 번째 전화가 왔다.
“그만해라.”
“어?!. 너 이렇게 나오면 안 되지.” “내가 널 얼마나 응원하는데. 흐흐.”
“그러니까, 나중에 전화할게.”
“분위기는 좋냐?”
“네가 망치고 있다. 끊을게.”
전화를 끊고 나니,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한편으로는 친구가 다시 전화하지 않기를 바랐다. 약간 화가 나기도 했지만, 아마 반대의 경우라면, 내가 했을 장난이었다.
“전에 얘기한 베트남 같이 갔던 국민학교때부터 친구예요. 이 친구가 좀 짓궂어요.”
어색함을 떨치고, 다시 대화를 이어 가다 보니, 어느새 고려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렇게 산에 오르니 생각보다 산에는 진달래가 많지 않았고, 사실 진달래는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산에서 내려와, 그녀가 찾아둔 넓은 정원의 카페에서 식사하고 커피를 마셨다.
그녀와의 자세한 대화는 잘 기억나질 않지만, 어스름 무렵, 카페에서 이야기하면서 느꼈던 그녀에 대한 실루엣은 기억난다. 그녀의 머리카락 출렁임, 손가락의 움직임, 맑은 눈동자, 웃고 있는 입매, 단정한 몸의 자태, 힘 있는 목소리 톤 등.
그날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반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일주일에 두 번은 만나자고 제안했고,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일상이 아닌 하루를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