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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Jul 24. 2022

8. 후천적 괴로움

내가 만든 괴로움

선천적인 괴로움이 태생적이며 숙명적 괴로움이라면 후천적인 괴로움은 운명적이며 욕망적인 괴로움이다. 선천적인 괴로움은 삶을 받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타고난 업’에 의한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내가 나로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반면 후천적인 괴로움은 ‘타고난 업’에 의해 영향을 받긴 하지만, 여기에서부터는 다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나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괴로움이 정해진다.


선택과 결정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려고 선택하고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렇게 생각해서 내린 결정들이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에게 괴로움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간혹 괴롭기 위한 선택을 내리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선택한 괴로움도 깊이 들어가 보면 또 다른 즐거움이나 이기심에 선택인 경우가 많다.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한 선택을 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행복을 위한 선택과 결정을 한다. 작은 한 가지 선택만 해도 여러 개의 경우의 수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기 위한 수많은 사전 선택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몰려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도 본인 스스로 해온 많은 선택의 결과이다. 이러한 선택과 결정이 모여 살아갈 운명을 만들어가고 운명의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욕망의 개화


이러한 선택이 갈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욕망의 개화(開花)’이다. 선천적인 괴로움은 대략 7살 이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대략 8살부터 16살 정도까지는 선천적인 괴로움과 후천적인 괴로움이 공존하고 그 이후에는 후천적인 괴로움이 인생을 지배한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말이 있다. 물론 이 말이 현대사회에서 적용된다는 말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로 다르게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왜 일곱 살이란 나이를 남녀를 분리하는 시기로 보았을까? 이 나이부터 욕망이 생겨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욕망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은 자아가 만들어져 가는 시기와 거의 겹친다. 나라고 하는 개념이 생기면서 나를 지탱해나가는 욕망도 같이 생겨난다. 이렇게 생겨난 자아와 욕망은 선천적인 요인과 함께 수많은 경험으로 완전한 자아를 확립하는 시기를 갖게 된다. 이른바 청소년기라고 하는 시기이다. 이렇게 청소년기를 거쳐 청년의 시기로 들어서게 되면 이미 욕망을 이루는 방식이 더 세련된 방식으로 확립되고 이러한 방식은 수많은 미래에 대해 선택을 하는 바탕이 된다. 이렇게 욕망을 이루는 방식에 대한 선택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나간다.     


이런 선택과 결정의 후천적인 괴로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운명적 괴로움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적 괴로움이다.     


운명적 괴로움


먼저 운명적 괴로움은 앞에서 말한 선천적 괴로움의 숙명적 괴로움과는 결이 다르다. 숙명적 괴로움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괴로움인데 반해 운명적 괴로움은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하지만 갖지 못하는 괴로움, 둘째는 사랑하지만 헤어지는 괴로움, 셋째는 미워하지만 만나야 하는 괴로움이다.


원하지만 갖지 못하는 괴로움은 물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다. 누구나 사람들은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모든 원하는 것을 가질 수는 없다. 그 누구도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없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결핍을 느끼게 되고 결핍은 괴로움을 낳는다. 물질적으로 다 가진 것 같은 부자들도 마음의 결핍을 피할 수 없다. 이런 결핍에서 오는 괴로움이 바로 원하지만 갖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사랑하지만 헤어지는 괴로움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죽음에 의한 이별도 포함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나와 관계된 감정과 기억이 모두 부정되는 것이다. 이제는 만들어갈 미래가 사라진 것이다. 이 괴로움은 허망함과 외로움이라는 괴로움을 동반한다.


미워하지만 만나야 하는 괴로움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만나기 싫지만 만나야 하는 직장 상사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무늬만 부부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만나는 괴로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경우 미움과 분노 그리고 자괴감이라는 괴로움을 동반한다.


운명적 괴로움과 욕망적 괴로움의 차이는 필연적이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운명적 괴로움은 필연적인 인간의 삶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관계를 이루고 살며 그 관계에서 기쁨도 얻고 슬픔도 얻고 즐거움도 갖고 괴로움도 갖게 된다. 이런 인간 삶의 기초적인 기반에 의한 괴로움이 운명적 괴로움이다.     


욕망적 괴로움


반면 욕망적 괴로움은 무엇일까? 그것은 욕망의 속성에 기인한 괴로움을 의미한다. 욕망의 속성은 불과 같다. 욕망은 불처럼 타올라 열기를 느낄 수는 있어도 잡을 수는 없다.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잡는 순간 그 불길에 몸을 데게 된다. 현명한 사람은 욕망을 옆에 두기는 해도 욕망에 빠져들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욕망의 불 속으로 뛰어드는 선택을 한다. 그렇게 욕망에 불타올라 스스로 재가 되기까지 괴로움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게 욕망을 태울 때 사람들은 기쁨과 즐거움에 빠져버리지만, 욕망이 타서 재가 될 때는 분노, 슬픔, 걱정, 두려움, 우울, 부끄러움이 드러난다. 결국 욕망에 의한 쾌락은 찌꺼기를 만들고 그 찌꺼기로 인해 괴로움이 발생한다.

또한, 욕망을 감지하고 느끼며 이루려는 모든 과정에는 ‘감각, 감정, 생각’이 관여한다. 욕망을 이루는 과정에서 이 세 가지의 요소들이 관여하게 되고, 욕망을 성취하면 성취한 대로 혹은 욕망을 이루지 못하면 이루지 못한 대로, 욕망을 이루는 과정에서 사용된 감각, 감정, 생각은 사라지지 않고 내 마음속에 고여 망상과 번뇌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감각적인 괴로움, 감정적인 괴로움, 사변적인 괴로움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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